기지 주변의, 흔히 기지촌(基地村)으로 불리는 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집과 사창가.
일상적인 가난과 폭력은 그만두고라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사건까지 벌어지는 곳이 기지촌이다.
‘그들만의 세상―아시아의 미군과 매매춘’(잉걸)은 아시아 지역 미군 주둔기지 주변에는 왜 매춘이 성행할 수밖에 없는지 분석한다.
역사학자이자 사진작가인 산드라 스터드반트와 르포작가인 브렌다 스톨츠퍼스는 필리핀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매매춘 여성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는 등 장기간의 연구 작업을 통해 이 책을 펴냈다.
책에는 이 밖에도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여성학자 신시아 인로 등 전문가의 해설이 곁들여 있다.
책은 기지촌 매매춘에는 계급차별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가 혼재돼 있으며, 그 정점에는 미 제국주의가 자리하고 있다고 밝힌다.
스터드반트는 “전 세계의 자연과 인력 자원을 통제·착취하고 수중에 넣는 것을 목표로 삼는 미국 기업의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미국이 벌이는 전쟁은 성노동시장을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미군과 기업의 활동은 농촌 지역의 전통적 경제기반을 파괴했고, 생계수단을 파괴당한 이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가난에 찌든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춘이 되기 쉽다는 것. 미국이 아시아에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치른 이래 아시아 여성 수백만명이 매매춘으로 내몰렸다.
군대는 노골적인 공격성을 기반으로 유지된다. 남자가 된다는 것, 사내가 된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공격성과 지배력을 갖춘다는 의미다.
군인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부드러움과 관련된 느낌은 여성스런 것으로 치부되어 뿌리 뽑아 없애버려아 하는 것이 된다.
“군대를 위한 매매춘은 야전군의 무기만큼이나 필수적”이며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 군인에게 주어지는 포상의 일환”이다.
미군이 기지를 나설 때면 정문에서 콘돔을 지급하라는 군 차원의 명령이 하달된다.
신시아 인로는 묻는다. “성적 ‘휴식과 오락’ 기간이 없다면, 미국 군대의 명령으로 젊은 남성을 멀고 지루한 항해와 육상훈련에 보낼 수 있을까? 아시아 여성은 성적으로 고분고분하다는 신화가 없다면 많은 미국인 남성들이 씩씩한 군인으로만 행동할 만큼 충분히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흔히 기지촌 여성은 우리와 상관없는 타인이라고,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가지 못하고 나락에 떨어진 부도덕한 존재라고 치부하지는 않았는가.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나와 동떨어진, 딴 세상 얘기라고 외면하진 않았는가. 저자들은 이런 고정관념을 바꿔야 한다고 촉구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편의 학대와 폭력을 견디다 못해 기지촌으로 흘러든 여성들이 과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 책의 미국판이 발간된 것은 1993년. 해외 주둔 미군의 감축이 논의되는 지금이라고 해서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1992년 윤금이씨가 미군에게 살해된 사건에 이어 2000년에는 이태원 외국인 전용클럽에서 종업원 김모씨가 미군에게 살해됐다.
필리핀의 미군 기지는 모두 폐쇄됐지만 수많은 필리핀·러시아 여성이 한국의 미군 기지촌으로 유입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 군대가 키운 매매춘에는 주둔국의 역할도 컸다. “서울 도쿄 마닐라의 정부들은 워싱턴과 맺은 ‘휴식과 오락’에 관련된 협정을 취소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채택한 매춘불가방침이 다른 곳에서는 채택된 적이 없다.”
브루스 커밍스의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미군기지가 없어지면 기지촌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미국인과 한국인은 자신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상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보연기자/byabl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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