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4월20일 국회 본회의장, 민주당 김대중(DJ) 의원이 연단에 올랐다.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을 처리하려던 때였다. 김 의원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1억3000만달러의 정치자금이 오갔다는 의혹을 폭로한 인물이다. DJ의 발언은 무려 5시간19분 동안 이어졌다. 헌정사상 사실상 첫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다.
DJ는 단순히 시간만 끌지 않았다. 그는 “정치인은 오늘의 현실을 다루는 동시에 내일을 내다봐야 한다”며 구속동의안을 처리하면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김 의원이 폭로한) 1억3000만불 수수가 사실인지 아닌지 철두철미하게 규명하자는 것을 우리가 원의(국회 의결)로써 한 사람의 이의 없이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철두철미하게 규명하는 데 있어서 지금 유일한 증거적인 존재는 김 의원입니다. 김 의원이 내놓은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자유롭게 있어야만 자기가 원하는 증인도 데려올 수 있고 자기가 원하는 증거물도 내놓을 수 있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논리는 명쾌했다. 국회가 의혹을 조사하기로 해놓고 정작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를 구속하면 진상 규명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다만 “김 의원이 자기 발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서도 “말에 단정적인 표현은 있다”고 지적했다. 무조건 두둔하지는 않은 셈이다.
여당이 감수해야 할 정치적 부담도 짚었다. 김 의원을 구속한 뒤 의혹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으면 야당과 국민의 의심만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여러분께 손해가 되면 되었지 이익이 될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법무부 장관에게 구속을 요청한 경위를 질문할 수 있도록 하면 발언을 끝내겠다는 절충안도 내놓았다.
결국 DJ의 필리버스터는 구속동의안 처리를 무산시켰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5시간19분이라는 기록만이 아니었다.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논리와 타협의 여지였다.
이후 국회에서 필리버스터 기록은 거듭 경신됐다. 2016년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12시간31분, 2020년 12월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12시간47분, 2024년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이 13시간12분동안 연설했다. 지난해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17시간12분을 기록했다. 급기야 같은 해 12월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에 반대하며 24시간 동안 연단을 지켰다. 역대 최장 기록이다.
그러나 대중의 뇌리에 남은 건 길어진 발언시간 뿐이다. 필리버스터 자체는 정치 공방의 한 과정으로 변질됐다. 최근 이런 양상은 더 심화되고 있다. 거대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앞세워 쟁점 법안 처리를 밀어붙이면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로 맞선다. 그러다 24시간이 지나면 민주당 등 범여권은 토론 종결을 의결하고 법안을 처리한다.
6일 ‘조작기소 특검법’이 국회에서 통과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국민의힘은 법안이 통과하기 하루 전 필리버스터를 24시간가량 진행했고 민주당은 표결로 종결한 뒤 특검법안을 의결했다. 국민의힘은 7일 경복궁역 앞에서 장외투쟁을 벌이겠다고 예고했다.
필리버스터는 다수결에 맞서는 소수의 마지막 수단이다. 그러나 토론보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향한 힘겨루기가 앞선다. 여댱은 표결을 위한 시간을 계산하고 야당은 그 시간을 버티는 데 급급하다.
62년전 DJ는 집권 여당을 향해 설득의 논리를 폈다. 지금 국회는 어떠한가. 다수당은 들으려 하지 않고 소수당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필리버스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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