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재판매 넷플로 일원화
방송사보다 제작비 회수 위험 적어
제작자 측에서도 ‘넷플 공급’ 선호
플랫폼이 IP부가 사업권 갖는 구조
흥행해도 추가 수익 확보는 불투명
국내 제작사 사실상 하청업체 전락
작품 기획도 입맛대로
한국문화 배경작품 제작 배제 가능성
해외서 통할 장르에 ‘투자 쏠림’ 우려
향후 국내 투자 지속성도 장담 못 해
제작비 싼 일본 등으로 중심 이동 전망
일각 “넷플 자금력 新 한류 기여 인정”
“우리 집 안방을 차지하고 누워 있는 손님.”
콘텐츠 업계 대표 A씨는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를 이렇게 비유했다. 한국 진출 10년을 맞은 넷플릭스는 이제 한 지붕 아래 식구가 됐지만, 그 막강한 영향력 앞에서 불편함과 두려움을 느낀다는 의미다. 넷플릭스는 한국 드라마가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통로이자 국내 제작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제작비를 대는 투자자다. 하지만 작품의 기획부터 유통, 지식재산권(IP) 확보까지 생태계 작동 방식을 바꿔 놓은 강력한 사업자이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 같은 세계적 흥행작은 한국 콘텐츠의 위상을 끌어올렸고 국내 제작사에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 하지만 지난 10년을 국내 콘텐츠 산업의 ‘성장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의 진단이다. 드라마 제작 편수는 줄고 제작비는 치솟았다. 투자는 플랫폼이 선호하는 작품에 쏠리고, 세계적 흥행을 거둬도 제작사가 그 성과를 후속 사업을 이끌 자산으로 축적하기 어려운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넷플릭스에 목매는 韓 제작사들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은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23일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방송사와 국내·글로벌 OTT를 합친 오리지널 드라마 편성 수는 2022년 136편에서 지난해 110편으로 줄었다. 반면 넷플릭스는 2021년 이후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를 연 9∼16편씩 선보여 왔다. 디즈니플러스(+)도 2022년 이후 연 8∼9편 수준을 유지했다. 국내 제작사에 글로벌 OTT는 이제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다. 작품을 만들고 유통해 수익을 얻기 위해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방송사가 방영한 드라마를 해외 방송사에 판매해 현지 방송권료를 받거나, VOD 등 부가 판권을 수출하는 등 여러 경로로 수익을 확보했다. 하지만 해외 유통이 넷플릭스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플랫폼 의존도는 높아졌다. 이헌율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해외 재판매가 넷플릭스로 거의 일원화되면서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고, 제작사들도 넷플릭스 공급을 우선시한다”며 “그만큼 국내 제작 생태계의 해외 플랫폼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제작사 입장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계약은 제작비와 10% 안팎의 마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반면 방송사 편성과 국내 OTT 유통, 해외 판매를 거치는 방식은 제작비 회수율이 약 70∼80%에 그쳐 손실 위험이 크다. 작품별 수익성에 민감한 제작사로서는 글로벌 OTT가 제시하는 안정적인 계약을 마다하기 어렵다. 안정성에는 대가가 따른다. 글로벌 플랫폼과 계약하면 제작비 회수 위험은 줄지만 작품이 세계적으로 흥행하더라도 추가 수익을 얻기는 어렵다. 플랫폼이 제작비를 부담하는 대신 작품의 IP와 부가 사업 권리를 확보하는 이른바 ‘매절’ 방식이 널리 통용되기 때문이다. 국내 제작사들이 글로벌 OTT에 콘텐츠를 납품하고 일정한 대가를 받는 하청 업체로 변모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글로벌 플랫폼 입맛 맞춰지는 콘텐츠
플랫폼 의존은 수익 구조를 넘어 작품 기획 단계부터 영향을 준다. 글로벌 시청자를 겨냥한 콘텐츠가 늘면서 로맨틱 코미디와 복수극, 액션처럼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달라도 이해하기 쉬운 장르에 투자가 쏠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경우 한국적 가족 관계와 직장 문화, 지역의 삶처럼 국내 시청자에게 익숙하지만 해외 시청자에게는 설명이 필요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다.
글로벌 OTT 시대 K콘텐츠의 IP와 수익 배분 문제를 다룬 저서 ‘슈퍼 IP’를 쓴 윤송이 작가(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는 “많은 제작사가 기획 때 국내 시청률보다 글로벌 반응을 먼저 이야기한다”며 “한국 콘텐츠가 한 단계 도약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콘텐츠가 특정한 성공 공식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해외 판매를 염두에 두고 제작 투자가 이뤄지면 해외에서도 통할 만한 장르에 무게가 실리고, 플랫폼이 선택하지 않은 다양한 콘텐츠는 제작될 가능성이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반적인 드라마에서는 문화적 맥락이 중요하지만, 수출용으로 만들어질수록 그런 맥락은 빠지고 빠른 쾌감이나 액션처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요소가 강조된다”고 설명했다.
◆넷플릭스 한국 투자는 계속될까
문제는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계속 투자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3∼24일 한국 진출 1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방한해 “한국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다”며 “앞으로 10년도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콘텐츠의 성과와 앞으로의 기대를 강조하는 듯한 발언이지만, 글로벌 플랫폼의 투자는 권역별 시장의 흥행 가능성과 제작비, 수익성을 따지는 사업적 판단에 따라 이뤄질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가 지난 20일 공개한 3분기 주주 서한은 어떨까. 이 문서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언급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아시아·태평양(APAC) 성공작으로 ‘동궁’(시청 수 2100만), ‘이런 엿같은 사랑’(2200만)이 언급됐지만 2분기 서한에서 소개한 ‘참교육’의 성과에 비하면 미진했다. 이어 4분기 공개 예정작으로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이 소개된 정도다. 이에 비해 인도는 “매우 성공적인 작품 라인업 성과”라는 표현으로 비중 있게 다뤄졌다. 넷플릭스 최초 일일 리얼리티 ‘록 업(Lock Upp)’은 넷플릭스 인도 역대 최다 시청 작품으로 제시됐다. 일본의 경우 8부작 시리즈 ‘다운타임’(원제 플라스틱 뷰티) 시청 수가 1200만을 기록하며 일본에서 역대 가장 많이 시청된 시리즈에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고정민 미래산업전략연구소 소장은 “국내 드라마 제작비는 넷플릭스가 끌어올려 놓았는데, 최근에는 넷플릭스가 더 싼 시장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같다”며 “일본만 해도 우리보다 제작비가 훨씬 싸다. 제작비가 저렴한 국가의 콘텐츠를 사들이거나 현지 기획을 늘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성공 결실 누구에게… IP·수익 배분 과제
글로벌 OTT와의 매절 계약은 국내 제작사가 흥행의 성과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이기도 하다. 한국 콘텐츠는 지난 10년간 세계적 흥행작을 배출했지만, 그 성과를 국내 제작사가 IP를 축적하고 사업을 확장하는 기반으로 삼지는 못했다. 물론 글로벌 OTT의 투자가 없었다면 애초에 제작되지 못했을 작품도 많다. ‘오징어 게임’처럼 막대한 제작비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프로젝트에서 넷플릭스의 자금력과 세계 유통망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IP를 넘기는 계약 자체가 “불리하다”고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윤 작가는 “현행 구조에서는 성공의 과실이 IP를 가진 플랫폼에 돌아가는 경우가 많지만, 넷플릭스도 최근 공동제작과 IP 분배 등을 시험하고 있어 변화의 여지는 있다”며 “작품의 IP를 제작사가 보유한 채 플랫폼에 일정 기간·특정 지역 방영권만 허락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제작사가 IP를 (플랫폼에) 넘기지 않고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정책 펀드 등 장치가 마련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라며 “글로벌 플랫폼이 특정 국가에서 올린 매출의 일정 비율을 자국 콘텐츠에 투자하도록 하는 일부 유럽 국가의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매절 계약 후 작품이 흥행해도 창작자가 추가 보상을 받기 어려운 현실을 개선하려는 입법 논의도 진행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이 지난달 대표 발의한 저작권법 개정안은 ‘정당보상청구권’을 도입해 영상 창작자가 저작권을 양도한 이후에도 추가 보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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