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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먼저” 철학 새긴 한옥… 100년 기업의 꿈 잇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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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SK그룹 선혜원

창업주 삼청동 사저 문화공간 탈바꿈
원형 재현 대신 전통가옥 세 채 올려
서원 닮은 구조… ‘지성 요람’ 의미 담아

좌우 다른 장식 기와 등 기업 정체성 투영
‘人’ 가운데 배치해 세대 사이 연결 상징
유산 재가공… 경험 선사 치열한 고민 필요

비록 ‘이틀천하’였지만 지난 6월, SK하이닉스는 코스피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가 25년7개월간 지켜왔던 자리였다. 한때 100원대였던 주가와 상장폐지까지 거론됐던 흑역사를 생각하면 화려한 반전이었다. SK그룹이 2012년에 인수한 SK하이닉스는 이제 그룹을 대표하는 회사가 되었다. 반면 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의 명맥을 잇는 회사는 SK네트웍스다. 인수된 회사가 그룹을 대표하고, 정작 뿌리를 잇는 회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SK그룹은 151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반도체부터 에너지, 통신, 바이오까지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그룹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SK그룹이 작년 가을, 창업회장이 1968년부터 살았던 삼청동 사저를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해 일반에 공개했다. 이처럼 구성원들만 쓰던 공간에 브랜드를 감각적으로 담아 공공에 개방하는 기업이 종종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김양아는 이런 공간에서 오감으로 쌓인 경험이 선호와 신뢰를 거쳐 기업의 자산이 된다는 점에 주목해, 이를 ‘감각자본’이라 불렀다(‘감각의 설계자들’, 김양아, 북스톤).

 

한옥과 잡상 같은 전통 요소는 창업회장이 살았던 집의 기억을 더 오래된 전통의 시간에 잇대는 동시에, 기업의 철학을 새롭게 해석해 전한다.
한옥과 잡상 같은 전통 요소는 창업회장이 살았던 집의 기억을 더 오래된 전통의 시간에 잇대는 동시에, 기업의 철학을 새롭게 해석해 전한다.

한 가지 업(業)으로 설명되는 기업은 공간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가 비교적 명확하다. 예를 들어, 화장품을 만드는 기업이 본사 건물로 ‘아름다움’의 가치를 말하고, 섬유 산업에서 시작된 기업이 연구시설 입면에 직물의 짜임을 새기는 식이다(연재 88차, 62차 참고). 그렇다면 하나의 업으로 설명하기 힘든 SK그룹은 공간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SK그룹이 선택한 방법은 그룹이 태동한 장소로 돌아가, 그곳을 대중 앞에 차례로 소환하는 것이었다. 2019년에는 옛 선경직물 수원공장의 건축 부자재를 옮겨와 용인 SK아카데미 안에 ‘SK기념관’을 원형대로 재현했다. 2024년에는 창립 71주년을 맞아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의 생가를 ‘SK고택’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삼청동 사저, ‘선혜원’이다. 세 장소 모두 기업의 역사를 자산으로 삼아 가치를 높이는, 이른바 ‘헤리티지 마케팅(Heritage Marketing)’의 결과물이다.

 

2025년 선혜원에서 열린 김수자 작가의 전시 중 하린당에 설치된 ‘호흡―선혜원’ 작품.
2025년 선혜원에서 열린 김수자 작가의 전시 중 하린당에 설치된 ‘호흡―선혜원’ 작품.

창업회장이 세상을 뜬 후 이 집은 SK네트웍스가 보유한 연수원으로 쓰였다. ‘선혜원(鮮慧院)’이라는 이름도 이때 붙었다. SK의 모태인 ‘선경(鮮京)의 지혜(慧)를 베푸는 곳’, 조금 더 넓게 풀면 ‘맑은 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이니 연수원이라는 용도와 잘 맞는다. 사저였을 당시 건물의 원형은 확인할 수 없지만, 연수원이었을 때는 동서로 긴 2∼3층 양옥이었다.

 

선혜원을 일반에 공개하면서 SK그룹은 앞의 두 시설과 다른 선택을 했다. 공장과 생가는 옛 모습을 되살렸지만, 사저는 원래의 모습을 지우고 현대식으로 지은 기단 위에 한옥 세 채를 새로 올렸다. 편리함과 다양한 기능은 현대식 건물이 맡고, 전체적인 인상은 한옥이 결정한다. 그 결과 1953년에 창업한 기업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의 시간에 잇대어진다. 창업회장이 실제로 살았던 집의 기억을 한옥이라는 전통의 이상형으로 번역한 셈이다.

설계에 참여한 이들의 해석도 이와 유사하다. 프로젝트 전체를 주관하고 기획한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는 “미래 지향적인 사업을 하면서도 그 뿌리를 잊지 않는 정신을 이어온 SK를 가장 한국적인 공간으로 구현”하려 했다고 밝혔고(온지음 집공방 인스타그램), 설계를 맡은 민성진은 “자연과 전통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와 장소의 정신을 새롭게 쓰는 프로젝트를 구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SKM Architects 홈페이지)

작년 가을, 비 오는 날 선혜원을 찾았다. 짧은 오르막길 끝에 ‘선혜원’이라는 현판을 건 동여루가 다소 거대해 보였다. 현대식 기단 위에 올라앉은 탓이다. 골목에서 시작된 계단을 따라 90도로 두 번 꺾어야 비로소 창연문이 나온다. 문을 지나 다시 방향을 틀어 동여루 아래 계단을 오르면, 잔디가 깔린 마당 뒤로 주 건물인 경흥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안동 병산서원에서 만대루 아래를 지나 입교당(立敎堂)과 그 앞마당에 이르는 경험이 떠오른다.

기억의 번역에는 해석이 따르기 마련이다. 선혜원에서 그 해석은 주로 전통적인 요소를 통해 드러난다. 첫 번째는 ‘이름’이다. 선혜원의 영역을 알리는 ‘창연문(昌演門)’은 크게 번성하여 뻗어 나간다는 뜻으로 풀 수 있고, 환대의 역할을 하는 ‘동여루(同輿樓)’는 사회와 함께 간다는 가치를 담고 있다. 마당과 연계해 여러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설계된 ‘경흥각(京興閣)’은 그룹을 흥성하게 한다는 뜻이고, 회의공간인 ‘하린당(賀隣堂)’은 이웃과 기쁨을 나눈다는 의미다.

두 번째는 ‘공간구조’다. 마당을 둘러싼 세 한옥과 문에서 주 건물까지 이르는 과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서원(書院)의 공간구조를 닮았다. 이곳이 SKMS(SK Management System) 연구소의 서울분원으로 기획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원 건축을 닮은 공간구조는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SUPEX)”에 이르는 SK만의 방식이 한국 지성 문화의 요람에 닿아 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마지막은 경흥각 지붕에 올려진 ‘잡상(雜像)’이다. 잡상은 추녀마루 위에 여러 신상(神像)을 빚어 얹는 장식 기와다. 선혜원의 잡상은 좌우가 다르다. 경흥각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우측 추녀마루에는 수펙스(SUPEX)와 같은 경영철학을 품에 안은 토우(土偶)가, 좌측에는 ‘建賢戠人源株百’이라는 일곱 글자가 놓여 있다. 창업회장(建)과 선대회장(賢)이 직물사업(戠)을 시작했고 현세대(源)가 100(百)년 기업(株)으로 키운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일곱 글자 한가운데 놓인 ‘人’ 자가 창업 세대의 직물사업과 현세대의 100년 기업을 잇는다. 이는 선대회장의 어록 중 하나인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 한 글자로 축약되어 올라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잡상은 궁궐이나 성문 같은 국가적인 건축물에만 쓰였다. 화마와 잡귀를 막아주는 주술적 의미와 함께 국가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선혜원에서는 창업 세대의 철학과 기업의 정체성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기업의 정책은 진심의 정도에 따라 시늉이 되기도 한다. 친환경 경영이 위장환경주의, 일명 ‘그린워싱(Greenwashing)’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헤리티지 마케팅도 어떤 이들에게는 ‘유산 워싱’처럼 보일 수 있다. 물론 선대의 이름을 내건 일이니 기업으로서는 어느 정책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중함이 즐거움이 되지는 않는다. 공간을 통한 헤리티지 마케팅이 임직원의 애사심을 고취하지만 정작 고객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기업의 역사관이 되지 않으려면, 유산을 재가공한 새로운 즐거움을 고객에게 주는 곳이어야 한다. 언제나 열려 있다고 해서 그 즐거움이 저절로 생기지도 않는다. 결국 감각자본은 그 공간이 얼마나 자주, 오래 열려 있느냐가 아니라 그곳을 다녀간 사람이 무엇을 안고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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