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남정훈 기자] 클러치 히터.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에 홈런이나 장타를 때려 팀을 승리로 이끄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다만 세이버매트리션들은 ‘클러치 히터는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득점권 타율은 스탯 회귀 법칙에 의해 결국 평균으로 돌아온다고도 한다. 일시적으로 평균적인 타격 능력보다 높게 나올 수 있지만, 표본이 확대되면 평균적인 타격 능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남자를 보면 클러치 히터는 존재하는 것 같다. 아니 존재한다. 팀이 정말 필요로 하는 순간에, 대포 한 방이 필요한 순간에 어김없이 타석에 서면 한 방을 때려낸다. KIA의 ‘슈퍼스타’ 김도영 얘기다. 2026년 10월의 김도영은 그야말로 역대 최고의 클러치 히터의 임팩트를 뿜어내고 있다.
17일부터 20일까지 전남광주와 서울에서 열린 KIA와 LG의 2026 KBO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준PO, 5전3승제)는 그야말로 ‘김도영 시리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조는 있었다. 지난 5일 잠실에서 열린 KIA와 LG의 정규리그 맞대결이 첫 번째. 9회초 2아웃까지 KIA는 3-4로 뒤져있었다. 1,2루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선 김도영은 고우석의 155km 포심 패스트볼이 몸쪽으로 잘 제구되어 들어온 것을 그대로 걷어올려 역전 쓰리런포로 장식했다. 지난달 2일 미국 메이저리그(MLB) 도전을 마치고 LG로 합류한 고우석이 KBO리그 복귀 후 맞은 유일무이한 피홈런이었다. 김도영의 클러치 홈런에 6-4 역전승을 거둔 KIA는 3위 탈환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2일 전남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 KIA와 LG의 정규리그 최종전이었던 이날 경기는 승자가 3위로 준PO 직행, 패자가 4위로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치러야 하는 ‘단두대 매치’였다. 이 경기도 끝낸 게 김도영의 한 방이었다. 김도영은 2-2로 맞선 8회 무사 1루에서 존 케네디(호주)의 가운데 몰린 실투성 슬라이더를 받아쳐 중앙 펜스를 넘겼고, KIA는 4-2로 승리하며 준PO 직행 티켓을 따냈다.
닷새가 흐른 17일 전남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준PO 1차전이 열렸다. LG는 두산과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1차전에서 끝내고 다시금 KIA를 만나러왔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마치고 LG 염경엽 감독은 “올 시즌 도영이한테 중요한 순간에 다 맞았다. 그를 막아내느냐가 핵심”이라고 했지만, 김도영은 또 다시 LG를 농락했다. 1-1로 맞선 4회 1사 상황에서 김도영은 LG 선발 앤더스 톨허스트의 149km짜리 초구 패심 패스트볼을 통타해 좌측담장을 넘겼다. 이날 경기의 결승포였다. 김도영은 멈추지 않았다. 3-1로 불안한 리드를 이어가던 8회 1사 1루에서 장현식의 6구째 포크볼이 가운데 몰린 것을 놓치지 않고 통타해 쐐기 투런포로 연결했다. 김도영의 클러치 홈런에 전의를 상실한 LG는 그대로 1-5로 패했다.
2차전에선 2타수 무안타 1볼넷 1사구에 그치며 ‘인간미’를 보인 김도영은 20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클러치 본능을 유감없이 뽐냈다. KIA가 2회 선두타자 나성범의 안타와 이어진 1사 만루에서 박정우의 적시타로 2-0을 만들며 LG 선발 카르스코를 1.1이닝 만에 쫓아냈다. 벼랑 끝에 몰린 LG는 케네디를 마운드에 올려 더 이상의 실점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박재현에게 적시타를 맞았고, 1사 만루에서 김도영을 만났다.
불과 8일 전 김도영에게 결정적인 홈런포를 맞았던 케네디는 이번에도 김도영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3구째 144km짜리 포심이 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김도영은 놓치지 않았고 때렸다. 김도영의 방망이를 떠난 공은 시속 179.3km로 무려 145.8m를 날아가 좌중간 스탠드 상단에 꽂혔다. 그랜드 슬램. 이 한 방에 사실상 LG의 가을은 끝났다. 아울러 1982년 개장해 44년 간 한국 야구의 상징이었던 잠실구장과의 이별을 고하는 홈런이었다. 이후 김도영은 세 타석에선 범타로 물러났다. 결정적인 순간에만 귀신같이 반응하는 김도영이었다.
김도영은 이번 준PO에서 안타를 딱 3개 때렸다. 근데 그게 다 홈런이었다. 그냥 홈런도 아니었다. 결승포, 쐐기포, 시리즈를 사실상 끝내는 만루포. 하나같이 영양가가 100점 만점에 만점이었다. 이래도 클러치 히터는 없다고 할 텐가. 준PO MVP는 당연히 김도영의 차지였다. 기자단 투표 97표 중 84표를 휩쓸었다. 만장일치가 아닌 게 이상할 따름이었다.
준PO를 빠르게 뚫어낸 KIA 이범호 감독은 김도영에 대해 “주자가 쌓이면 하나 쳐줄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진 선수다”라고 극찬을 보냈다.
이날 멀티 솔로포를 터뜨린 선배 나성범과 수훈선수 인터뷰에 임한 김도영은 덤덤했다. 그는 “시리즈를 빨리 끝내서 기분 좋다. MVP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도 MVP에 버금가는 실력을 보여줄 수 있게 더 열심히 하겠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번 시리즈에서 단타 없이 홈런만 3개를 쳤는데 필요할 때마다 홈런이 나오는 게 나도 신기하다. 든든한 선배님들과 훌륭한 동료들이 많아 LG의 집중 견제에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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