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 미혼모·과다 채무자 등
피해자 다수 경제적 취약 상태
지인 포섭 어려워지자 타깃 변경
보육원 출신·무연고자·장애인 등
신분증·통장사본 뺏고 해외 보내
감금·전기 고문… 범행 강요당해
또다른 피해자 협박 가해자 전락 중>
“해외인력 구하려면 진짜 나락 간 애들을 노려야 한다.”
캄보디아 한 사기범죄조직의 유인책들은 텔레그램 대화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들을 주요 타깃으로 정했다.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범행을 실행할 사람을 선별적으로 물색한 것이다.
생활고로 힘들어하는 미혼모나 보육원 출신 청년, 무연고자와 지적장애인 등이 이들의 포섭 대상이 됐다. 유인책들은 한 미혼모에게 접근해 “임산부니까 빨리 돈 벌어서 애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 캄보디아에는 사무실이 있고 안전하다”고 말하며 캄보디아로 유인했다. 이 여성은 현지 범죄단지에서 범행 가담 협박을 받으며 전기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아기를 유산했다. 법원은 이 여성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최근 해외 사기범죄조직의 유인 방식은 과거처럼 지인보단 ‘절박한 사람’을 노리는 형태로 변화하는 추세다. 범행 수법이 알려지면서 지인을 설득하기 어려워지자 범죄에 가담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해외 사기범죄조직에 유인되는 모든 청년을 ‘선량하기만 한 피해자’로 보긴 어려워도, 이들이 왜 가담하게 됐는지도 함께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법원에선 이러한 피해자들과 관련한 사건 재판도 드물지만 이뤄지고 있다. 이른바 ‘국외이송유인’ 사건이다.
20일 사법정보공개포털과 판결문 검색 서비스 엘박스(LBox)를 통해 2016년부터 2026년 6월까지 선고된 관련 사건 1심 판결문 8건을 분석한 결과, 범죄조직은 피해자의 계좌와 노동력을 범행에 이용하기 위해 유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피해자는 정상적인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청년이나 미혼모 등 취약계층이거나 노숙인, 과다 채무자였다. 2016∼2017년 2건 수준이던 국외이송유인 사건은 2025∼2026년 6건으로 3배 증가했다.
◆경제적 취약 청년들 골라 범행
피해자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는 ‘청년’이었다.
국외이송유인 사건 8건의 전체 피해자 15명 중 보육원 출신자와 정상적인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사회초년생, 미혼모 등 청년이 46.7%(7명)였다. 노숙인(33.3%·5명), 자영업자 등 과다 채무자(20.0%·3명)가 그 뒤를 이었다.
지난해 4월 울산지법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은 국외이송유인 사건 피고인은 ‘무연고자’와 저신용 사회초년생을 골라 범행했다. 해외에서 실종돼도 경찰에 신고할 가족이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판단력이 취약한 지적 장애인도 사냥감이 됐다. 캄보디아에 파견된 경찰인 박동기 코리아전담반 팀장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장애인 특별채용’이라는 가짜광고를 올려 20대 후반 지적장애인을 유인해 감금하고 한국의 부모에게 돈을 요구한 일당을 검거해 구출한 사례도 있었다”며 “범죄조직은 가장 약한 사람을 골라 그 약점을 철저히 이용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1월1일부터 올 4월30일까지 1년4개월간 선고된 ‘범죄단체가입·활동’ 판결문 중 해외 사기범죄조직과 관련한 1심 판결문 214건을 분석한 결과 전체 피고인 380명 중 87.8%(324명)가 조직의 통제 속에서 범행에 동원됐다. 외출과 외부 연락을 전면 통제당한 피고인이 83.4%(311명)에 달했고, 입국 직후 여권과 휴대전화 유심을 빼앗긴 피고인이 43.4%(162명), 직접적인 강압·폭행·협박이 판결문에 적시된 경우도 44.8%(167명)였다.
◆유인부터 출국까지, ‘장주케어’
과거에는 사채를 갚지 못한 채무자들을 조직원으로 부리며 단순히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했다면, 최근에는 형태가 한층 악랄해졌다.
범행에 안전하게 쓸 수 있는 ‘인보증(인간보증)’ 계좌를 확보하겠다며 통장 명의자까지 비행기에 태워 현지에 감금하고 신고를 막기 위해 피해자까지 범죄에 가담하게 하는 식이다. 대포통장 명의인들이 계좌를 넘긴 뒤에도 통장에 입금된 범죄수익금을 중간에 몰래 인출해 달아나는 일이 잦아지자 낸 방책이다. 조직들은 통장 명의자가 출국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이른바 ‘장주(통장 명의자)케어’ 인력까지 배치했다.
한 조직원은 서울에 연고가 없는 피해자를 용산구 한 여관에 투숙시키고 식비 명목으로 50만원을 쥐여줬다. 출국 전날까지 함께 밥을 먹고 PC방을 동행하며 “전에도 통장을 넘겨준 사람들이 전부 돈을 벌어서 돌아가는 것을 봤다”고 피해자를 안심시켰다.
대출을 빌미로 통장 사본을 먼저 받은 뒤 유인하기도 했다. 올해 4월 선고된 전주지법 판결문에 따르면 조직원들은 인터넷 대출 광고를 보고 연락한 학생에게 “학생 신분이라 대출 심사가 오래 걸린다”며 신분증과 통장 사본을 택배로 먼저 받아냈다. 조직원들은 “돈이 급하면 캄보디아로 가서 일해라. 한국인은 수당을 더 준다”며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불러냈다. 피해자가 현지에 도착해 통장을 불법자금 세탁에 쓴다는 말을 듣고 계좌 제공을 거부하자, 조직원들은 범죄단지에 넘겨 감금했다.
◆두려워 공범으로, 귀국 후 ‘피고인’
일단 해외로 넘어오면 조직은 범죄에 발을 담그게 하는 방식으로 탈주를 막았다.
20대 남성 최동일(가명)씨는 지난해 6월 벌이던 사업들이 잘 풀리지 않던 차에 대출이자와 아버지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지면서 궁지에 몰렸다. 살인범 검거를 도와 경찰 감사장까지 받았던 최씨였지만 지인의 제안으로 캄보디아에서 조직이 범죄에 이용할 대포통장을 구하는 역할을 맡았다.
프놈펜의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최씨 여권과 휴대전화는 총책의 금고로 들어갔다.
총책은 실적이 없으면 전기충격기를 몸에 댔다. 최씨는 총책이 건넨 통장 모집 글을 복사해 텔레그램 홍보방에 올렸다. 모집 글을 보고 입국한 강선우(가명)씨가 범죄단지로 끌려왔다. 최씨는 총책의 지시에 따라 강씨를 폭행하는 일에 가담했다. 강씨를 폭행한 또 다른 조직원 역시 불과 다섯 달 전엔 통장을 팔러 온 채무자였다.
현지에서 고문을 당하고 통장을 빼앗긴 피해자가 법정에선 범죄자로 처벌받는 모순도 있다.
법원은 강씨를 ‘국외이송유인 피해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범죄조직에 계좌를 넘겼다는 이유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사람이 이쪽에선 피해자가, 저쪽에선 범죄자가 된 것이다. 검찰은 형량이 낮다며 항소한 상태다.
유인책들이 나눈 텔레그램 대화처럼 조직은 ‘나락 간’ 피해자들을 노렸고, 이들은 범행의 도구로 이용됐다. 지시대로 타인을 속이고 폭행해야 했던 이들은 이제 피고인석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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