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미술관 김정윤 학예사의 전시 철학
전시 기획 넘어 연구·기록까지 잇는 역할
지역의 깊이에서 세계 미술의 맥락 찾아
관람객의 경험으로 살아 숨쉬는 미술관
전문 지식 문턱 낮추고 ‘친절한 길’ 제공
삶과 죽음의 질문 미학의 언어로 풀어내
휘발되는 전시 허무함 넘어 ‘아카이브’로
작품 곁에서 매 순간 새로운 시선·질문
전시실의 조명이 켜지기 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철학의 뼈대를 세우고 작품의 숨결을 배치하며 짓는 사람. 학예연구사(큐레이터)의 일은 전시를 기획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와 작품을 연구하고, 기관의 소장품과 자료를 관리하며, 관객에게 미술을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고, 전시와 연구의 결과를 기록해 다음 작업으로 이어가는 일까지 그 역할은 넓고도 깊다. 특히 지역의 공립미술관에서 일하는 학예연구사에게는 한 지역의 미술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동시에 그것을 더 넓은 미술의 맥락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요구된다.
◆지역의 깊이로 세계의 맥락을
대구미술관 전시기획팀에서 전시 기획과 미술관 운영 업무를 아우르는 김정윤 학예사의 출발은 거창하지 않았다. 유럽의 미술관을 방문하던 중, 완성된 전시 너머 분주하게 작품을 설치하던 사람들의 모습. 그 우연한 장면 하나가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호기심을 지폈고, 공간과 사유를 조율하는 학예사의 길로 이끌었다.
대구미술관은 2011년 개관 이래 공립미술관으로서 지역성과 국제성을 아우르는 다층적 프로젝트를 선보여왔다. 지역 작가들을 꾸준히 소개하는 프로그램과 대구 출신의 이인성 화백을 기리는 ‘이인성미술상’을 운영하는 한편, 션 스컬리, 렘브란트 등 해외 거장의 전시를 통해 지역민들에게 국제미술의 흐름을 소개해왔다.
이러한 미술관의 지향점 속에서 김 학예사가 정의하는 대구미술관의 주요 역할은 ‘지역미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기반으로, 시민들에게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흐름과 가치를 연결하는 일’이다. 그가 말하는 지역미술 연구는 단순히 대구 출신의 작가를 소개하는 일차적 기획에 그치지 않는다. 한 지역에서 자생한 예술적 흐름을 조사하고 기록하여 한국미술사, 나아가 세계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그것이 지니는 독자성과 관계성을 밝혀내는 일이다. 지역을 깊이 들여다보되 그 안에 갇히지 않고, 미술사라는 더 넓은 지평 속에서 지역의 역사를 스스로 서술해 나갈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공립미술관 학예사에게 주어진 책무라는 것이다.
◆관객의 자리에서
연구자로서 지닌 깊은 미학적 탐구를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관람객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는 늘 치열한 고민이 따른다. 먼저, 그는 관람객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한 철학으로 둔다. 기획자는 이미 작가와 작품에 대한 맥락을 알고 있기에, 자신에게 당연한 지식이 관객에게도 당연할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연구자로서의 주관이 과해지면 전시가 자칫 특정 전문가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이들만의 폐쇄적인 공간이 될 위험이 크다. 김 학예사는 모든 연령과 관객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시선으로 작품에 다가갈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 친절한 길을 트는 것이 공립미술관 학예연구사로서 지켜야 할 확고한 원칙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전시를 준비할수록 의식적으로 관람객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한다. 전시에 따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친절하게 제공하는 등, 관객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한다.
김 학예사는 미술관을 ‘관람객의 경험을 통해 살아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미술사적 담론뿐만 아니라 생명, 일상, 감정과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보편적인 명제들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둔다. 계절의 순환과 삶의 관계를 풀어냈던 이전 기획에 이어, 최근에는 인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상실이나 슬픔의 그늘로만 바라보기보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과 기억, 그리고 도리어 현재의 삶을 묵직하게 감싸 쥐게 만드는 전시를 구상하고 있다. 이처럼 삶과 맞닿은 보편적 화두를 미학적 언어로 번역해 내는 일은 연구자 개인으로서 그가 지닌 관심과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사라짐 뒤에
전시는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지극히 일회적이고 휘발적인 예술 형식이다.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과 함께 공들여 준비한 전시가 불과 몇 개월 만에 빈 공간으로 돌아갈 때 느껴지는 허무함은 학예사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사라짐이야말로 기억과 기록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김 학예사는 관람객에게 전시는 결국 기억과 잔상으로 잔존하며, 단 한 점의 작품이나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이나 생각 하나가 오래도록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전시가 충분히 의미 있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학예연구사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아카이브를 더욱 중요시하게 된다. 전시는 사라지지만, 전시가 남긴 연구 자료와 텍스트, 사진 등은 미술관에 축적되어 다음 세대의 연구와 전시를 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전시는 한편으로는 사라지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람객에게는 기억으로, 미술관에는 기록과 연구의 축적으로 남는 것이겠지요.”
◆질문을 남기는 언어, 미술의 곁에 서서
머릿속에 맴돌던 아득한 사유가 공간과 조명, 작품과 텍스트를 만나 하나의 완성된 장면으로 구현되는 순간, 그리고 그 전시가 기획자의 의도를 넘어 관객 각자의 경험으로 체화되는 모습을 볼 때, 김 학예사는 이 고단한 작업을 계속해 나갈 동력을 얻는다고 한다. 그는 기획자의 의도와 관람객의 경험이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다며, 오히려 관객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작품을 보고 각자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할 때, 전시가 비로소 기획자의 손을 떠나 관람객의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에게 미술은 명확한 답을 주는 매체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는 질문이다. 똑같은 작품이라도 어떤 계절,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에, 그는 ‘아직도’가 아니라 ‘매번 새롭게’ 미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지역의 뿌리 깊은 예술적 토양을 집요하게 연구하면서도 보편적 세계의 맥락을 놓치지 않는 안목, 그리고 전시와 연구, 기록을 통해 그것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려는 태도. 오늘도 김정윤 학예연구사는 사라질 전시 너머에 오래 남을 질문과 기록을 만들어가고 있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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