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나 연인 사이 갈등의 칼끝이 당사자를 넘어 부모와 자녀 등 ‘무고한 가족’을 정조준하고 있다. 결별이나 이혼 요구를 빌미로 가족을 대리 보복의 수단으로 삼아 살해하거나 공격한 사건이 전체 친밀관계 폭력의 64%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16일 경기대학교 공정식 범죄심리학 교수 연구팀이 한국안전문화학회 학술지 ‘안전문화연구’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1973년부터 2021년까지 선고된 친밀관계 폭력 사건 판결문 약 80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범행 대상이 된 가족 등 ‘관계 밖 피해자’는 최소 157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사망자는 144명에 이른다. 같은 기간 목숨을 잃은 직접 갈등 당사자(31명)보다 무려 4배 이상 많은 가족과 지인이 목숨을 잃었다.
◆ “너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겠다”…처가와 어린 자녀 노린 보복
공격 대상은 피해자의 부모·형제자매 등 직계 가족이 39건으로 가장 많았고, 미성년 친자녀 등 아동을 노린 범행도 31건에 달했다. 피해자의 새 연인이나 배우자를 표적으로 삼은 사례는 20건이었다.
공격 유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족 전체를 함께 겨냥한 공격이 27건(33.8%), 가족에게 대신 화풀이한 대리 보복 공격이 24건(30.0%)으로 나타났다. 가족을 직접 노리거나 복수의 도구로 삼은 비율이 전체의 63.8%로 절반을 훌쩍 넘긴 셈이다.
연구팀은 가해자들이 상대방에게 극심한 타격과 손실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가족을 공격했다고 분석했다. “행위자가 상대방과 가족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인식하고 가족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 양상이 뚜렷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자녀를 살해한 일부 가해자는 ‘아이를 남겨두면 불행해진다’며 비정상적인 논리로 범행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 가족 주거지 사전 답사·배달원 위장…“가족 보호망 확대 시급”
가족을 향한 공격은 우발적 충동을 넘어 치밀한 사전 계획 아래 이뤄졌다. 분석 대상 판결문 64건에서는 흉기 구입 외에도 가족 주거지·근무지 파악, 배달원 위장, 인화물질 운반, 잠복과 유인 등 사전 준비 정황이 드러났다. 최근 발생한 서울 송파구 장모 살해 사건과 제주 부녀 사망 사건 역시 이혼 소송 중 가족을 겨냥한 전형적인 보복 범죄로 꼽힌다.
현재의 피해자 보호 체계로는 가족의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팀은 “직접 당사자에 대한 접근만 차단할 경우 공격 대상이 가족으로 옮겨가는 위험을 놓칠 수 있다”며 “‘숨겨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가족을 협박하거나 가족 주거지를 배회·촬영하는 행위를 중대한 사전 위험 신호로 분류해야 한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가족까지 파괴하는 관계성 범죄를 막으려면 신변보호 체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가족과 주변인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은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라며 “개별 사건 대응을 넘어 전담 기구 신설과 가족 임시 거처 확충, 인력·예산 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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