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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 성지’에 드리운 암운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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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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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고 그로티우스(1583∼1645)는 네덜란드 출신 법학자다. 어릴 때부터 ‘천재’로 통한 그로티우스는 10대 나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외교관이 되어 영국, 프랑스 등 이웃 강대국을 상대로 네덜란드의 국익을 관철하는 역할을 맡았다. 주(駐)프랑스 대사만 10년가량 역임했을 만큼 외교적 역량을 인정 받았다. 외국 정부와 숱한 협상을 벌이면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쓴 책 ‘전쟁과 평화의 법’(1625)은 오늘날 국제법이란 학문 영역을 창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제법의 도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 청사 전경. AP연합뉴스
‘국제법의 도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 청사 전경. AP연합뉴스

그로티우스가 남긴 유산 때문인지 네덜란드는 세계 각국 사이에서 국제법 연구·교육의 성지(聖地)로 통한다. 1907년 일명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이는 옛 국제법을 가다듬어 국제 질서를 재정비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당시 국제법을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고 부르던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도 이준 열사를 특사로 임명해 회의에 보냈다. 하나 헤이그에서 일본의 부당한 국권 침탈을 호소하려던 이 열사의 계획은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좌절됐다. 헤이그는 한국인들에겐 나라 잃은 설움을 상기시키는 도시다.

 

국제법의 발상지요, 중심지답게 오늘날 유엔 산하 국제사법재판소(ICJ)와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나란히 헤이그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 ICC가 요즘 국제적 갈등의 무대로 부상했다. 지난 2023∼2024년 ICC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에게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이 발단이었다. 푸틴에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네타냐후에겐 이스라엘의 중동 가자 지구 침공의 책임을 각각 물었다. 그러자 러시아는 물론 이스라엘의 맹방인 미국도 ICC를 겨냥해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난 9일(현지시간)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왼쪽)이 네덜란드 헤이그의 왕궁을 방문해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왼쪽)이 네덜란드 헤이그의 왕궁을 방문해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노벨평화상이 전직 ICC 재판관에게 돌아간 직후 ICC의 미국 내 자산 동결 등 고강도 금융 제재를 단행했다. 러시아 정부는 푸틴 체포영장 발부에 관여한 아카네 도모코(赤根智子) ICC 소장의 신병 확보까지 추진하고 나섰다. ICC 청사를 유치하고 나라의 자랑거리로 여겨 온 네덜란드 정부로선 심기가 몹시 불편할 것이다. 지난 9일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은 아카네 소장을 왕궁으로 초청해 격려하고 네덜란드의 연대 의지를 표명했다. 네덜란드가 아카네 소장의 모국인 일본과 한 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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