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이 정치 격변 속에 들어가 격랑의 제물로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을 때와 성인이 되어 역사책을 넘길 때, 최영만큼 큰 괴리를 느끼게 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위인전에서 최영은 홍건적과 왜구를 맞아 백전백승한 명장이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평생 지킨 청렴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대학 강의를 준비하며 ‘고려사’를 읽다가 만난 최영은 사뭇 달랐다. 물론 이색의 말처럼, 그는 ‘87전 87승의 명장’이었고 ‘황금을 흙덩이처럼 본(視黃金 如土塊) 청렴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휘하 장졸들에게 매우 가혹한 상관이면서도, 이인임 같은 권세가에게는 관대했던, 일관성을 잃은 재상이기도 했다.
더구나 명나라의 요구가 지나쳤다 하더라도, 요동 공벌이라는 무모한 전쟁을 추진해 자칫 나라와 백성을 중대한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윤소종이 남긴 “세운 공은 온 나라를 덮었지만, 지은 죄는 천하에 가득 찼다(功盖一國 罪滿天下)”는 평가는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럼에도 사료 속 최영이 어린 시절 위인전에서 만난 최영과는 달랐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이 최영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갈라놓았을까? 그는 언제부터 위험한 길로 들어섰을까?
첫째, 권력자 이인임과 손을 잡았던 1377년 무렵이다. 최영이 보기에 이인임은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정세를 재빨리 파악하고, 왕의 마음을 움직이며, 사람을 모아 세력을 만드는 데 능했다. 공민왕 때 신돈의 눈 밖에 나 좌천된 경험이 있던 최영으로서는 권세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 자기 신상과 입지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최영을 신진 유학자들의 정적으로 만들었다. 군사적 능력과 개인적 청렴만으로는 헤쳐 나가기 어려운 권력정치의 세계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둘째, 우왕의 장인이 되었을 때였다(1388년 3월).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우왕은 최영에게 의지했고, 그를 자기편에 묶어두기 위해 최영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했다. ‘고려사’에는 최영이 몇 차례나 거절했지만 휘하 장수들이 “우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밀어붙여 결국 수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강직하고 곧은’ 성품의 최영이 끝까지 이를 뿌리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결국 우왕과 같은 배를 타면서 그의 운명도 왕과 함께 가라앉는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셋째, 결정적으로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신흥 패권국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려 했을 때였다(1388년 4월). 물론 명나라의 요구가 고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요동 공벌에도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4불가론’이 보여주듯, 당시 고려의 국내외 여건을 고려하면 요동 공벌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피아의 힘과 전쟁의 조건을 냉정하게 헤아리지 않은 채 명분과 용기만으로 전쟁을 결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판단도 없다. 그런 점에서 요동 공벌은 무인 최영의 결기가 이성계의 현실적 판단을 묵살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최영은 정치가라기보다 장군으로 남았어야 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정치세계의 복잡성과 권력의 작동 방식,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정치적 리더십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그가 권세가와 손잡고 왕의 장인이 되는 순간 비극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평시였다면 아마 그는 훌륭한 장군이자 재상으로 생을 마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는 국내외 질서가 송두리째 바뀌는 거대한 전환기였다. 준비되지 않은 채 정치적 격변의 중심으로 들어간 그는 마침내 그 격랑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고려사’에 기록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는 가르침이 새롭게 다가온다. 최영이 돌이나 흙덩이처럼 보아야 했던 ‘황금’은 과연 돈과 재물뿐이었을까. 재물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이 정치권력이다. 대한민국의 어설픈 정치군인과 정치검찰이 무겁게 새겨야 할 대목이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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