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탄생/조세핀 퀸/이지은·장시은·배소연 옮김/까치/3만9000원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사의 가장 굵은 줄기는 고대 그리스가 철학과 민주주의를 낳고 로마가 이를 계승하면서 시작된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암흑시대’를 거치지만 르네상스가 그리스·로마 고전을 되살리면서 근대 서양이 태어났다는 서사다.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에서 고대사를 가르친 저자는 이런 서양사 서술에 반기를 든다. 4000년 전 레바논 지역 무역항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고대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이동하고 거래하고 서로에게서 배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원전 2000년대 동지중해 항구에는 먼 지역에서 온 사람과 물건이 모였고 발트해에서 난 호박은 수천㎞를 이동했다. 문자와 항해술, 금속 기술, 수학과 문학도 어느 한 사회 안에서 완성된 뒤 바깥으로 퍼져나간 것이 아니었다. 레반트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인도와 북아프리카를 오간 사람과 물자가 끊임없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한쪽이 만들어 다른 쪽에 전달한다는 ‘영향’이라는 말조차 경계한다. 외부에서 들어온 무엇을 받아들이고 버릴지, 자기 필요에 맞게 어떻게 바꿀지는 받아들이는 사회가 선택했다. 역사는 유산을 일방적으로 물려주는 계보가 아니라 선택과 변형이 거듭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중세 아랍 세계가 그리스 지식을 단순히 ‘보존’했다가 유럽에 돌려줬다는 설명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번역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었고 인도에서 나온 수 체계와 아랍권 수학 등 유럽 밖에서 발전한 지식은 여러 경로를 거쳐 서쪽으로 흘러들었다.
최신 과학도 이런 서술을 뒷받침한다. 고대 DNA 분석은 기원전부터 사람들이 출생지에서 멀리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얼음 코어와 호수 퇴적물, 나이테를 활용한 기후 연구는 사회가 복잡해지거나 단순해지는 과정을 ‘문명의 흥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경계하는 것은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 자체다. 오늘날 익숙한 ‘문명들’과 ‘서양 문명’이라는 관념은 고대부터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근대 유럽이 세계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굳어졌다는 것이다. 서로 뒤섞여 있던 과거에 경계를 긋고 그리스와 로마를 ‘우리’의 조상으로 선택한 것 역시 후대 사람들이었다.
서양의 탄생을 추적하는 작업은 1492년 무렵에서 멈춘다. 콜럼버스 항해로 대서양 세계가 열리고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축출됐다. 인간 사회가 전에 없이 넓게 연결되는 동시에 ‘우리’와 ‘그들’을 더욱 강하게 구분하기 시작한 시기다.
결국 신간이 새로 쓰려는 것은 서양의 족보가 아니다. 족보라는 방식 자체를 버리자는 제안에 가깝다. 그리스와 로마를 역사에서 끌어내리는 대신 그들 역시 훨씬 넓은 사람과 사물, 지식의 그물망 속에 놓는다. 서양은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문명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회가 만나고 헤어지고 서로를 바꾸면서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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