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dak 필름 한 롤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며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카메라에 표시된 필름 카운터가 25 정도가 되면 고민이 시작됐다. 필름을 새걸로 갈아야 하나 남은 거로 찍어도 될까? 제한된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신중함과 긴장감, 설렘은 지금의 디지털카메라 시대에는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다.
사진기자는 본인이 취재했던 사진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관한다. 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사진의 중요도를 떠나 보관을 많이 하는 사진기자이다. 역사의 중요했던 순간도 있었고, 상황이 기억도 없는 시답지 않은 사진도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담은 기념사진도 있고 취재와 출장 중에 보이는 나의 모습도 있다.
아주 먼 옛날의 모습은 아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열어본 나의 외장하드를 독자들과 같이 꺼내보고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최근 비무장지대(DMZ) 내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의 원인이 북한군 지뢰로 밝혀지면서 우리 군 장병들이 부상을 입고 정전협정이 위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남북 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우리 군과 유엔사는 합동 현장조사를 통해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북한의 지뢰 1발을 추가로 발견하였으며, 이를 통해 이번 폭발 사고의 원인이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유엔사는 북한의 지뢰 매설이 정전협정 위반에 해당한다고 공식 결론을 내렸고 우리 군은 북한의 국경선 요새화 중단을 촉구하며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은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 원인이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군의 발표를 전면 부인하면서 이를 빌미로 국경선에서 실사격을 한다면 가차 없이 보복하겠다고 위협했다.
1999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북 관계는 대북 유화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6월에는 사상 최초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때 열린 광복절 행사와 퍼포먼스에서도 남북 화해의 분위기가 그대로 표현됐다.
망치가 얼음벽을 내리칠 때마다 투명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여름 햇볕에 녹아내리는 얼음 사이로 참가자들은 연신 망치와 곡괭이를 휘둘렀다.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물들인 거대한 얼음벽은 조금씩 갈라졌고, 이내 큼지막한 얼음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단의 벽을 허물고 남북이 하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상징적인 퍼포먼스였다.
1999년 8월 15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과 통일대교 북단에서 광복 54주년을 맞아 ‘99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겨레 손잡기 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이날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통일대교 북단에 설치된 대형 빙벽이었다. 남과 북을 가로막은 분단의 벽을 형상화한 얼음 구조물을 참가자들이 직접 부수는 행사였다. 사진 속에는 빙벽 양쪽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망치를 힘껏 내리치는 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흰색과 파란색 모자를 쓴 시민부터 군복을 입은 장병, 행사 관계자까지 한데 섞였다. 누군가는 곡괭이를 높이 치켜들었고, 누군가는 이미 갈라진 얼음을 손으로 떼어냈다. 얼음벽 아래에는 부서진 조각과 녹은 물이 뒤엉켰다.
임진각에서는 제54주년 8·15 기념식도 열렸다. 무대 뒤편에는 한반도의 산맥을 그린 대형 그림이 펼쳐졌고, 앞에는 행사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자리했다. 한쪽에는 ‘이제 우리 손을 잡자-손잡고 평화로 다 함께 통일로’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행사의 의미를 전했다.
1999년은 남북 화해에 대한 기대와 군사적 긴장이 동시에 존재하던 때였다. 불과 두 달 전인 6월에는 서해에서 남북 함정이 충돌한 제1연평해전이 벌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맞은 광복절이었기에 임진각에 모인 시민들이 손을 맞잡고 얼음벽을 허무는 모습에는 평화를 향한 당시 사회의 바람이 짙게 배어 있었다.
27년 전 카메라에 담긴 거대한 얼음벽은 이제 사진 속에만 남아 있다. 망치질에 금이 가고 무너지는 벽, 그 양쪽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사람들. 1999년 광복절의 임진각에서는 쉽게 허물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대신해 얼음으로 만든 분단의 벽을 먼저 깨뜨리고 있었다. 그날 사람들은 차가운 얼음벽 너머에 있을 ‘통일’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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