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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다 졌는데 왜 가?”… 지금 양평 세미원에 가야하는 이유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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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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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원·두물머리 초가을 향기 물씬

징검다리 건너며 맑은 물로 마음 씻고

예쁜 수련 보며 마음 곱게 가꿔

유엔 ‘베스트 투어리즘’ 두물머리

산책로 끝 ‘두물경’엔 장쾌한 물줄기 

 

세미원 징검다리.
세미원 징검다리.

“졸졸졸졸∼.” 정원으로 들어서자 어린아이 눈동자처럼 맑은 물소리가 먼저 마중 나온다. 징검다리 위로 내딛는 발걸음이 유독 가벼운 건 초가을을 맞는 기쁨 때문인가 보다. 돌 하나 건널 때마다 재잘거리는 물소리가 발밑에서 튀어 오르고, 저만치 남은 늦더위는 그 소리에 밀려 슬며시 물러선다. 흐르는 물 보며 마음을 씻고, 꽃 보며 마음을 곱게 가꾸는 양평 세미원에서 가을의 문턱을 걷는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박희준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박희준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박희준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박희준 기자

◆마음을 씻는 정원, 세미원

 

6번 국도를 달려 두물머리에 이르자 경기 양평은 초가을의 강바람으로 물들어 있다. 화려하던 연꽃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커다란 초록 연잎만 무성하게 남아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경기 제1호 민간정원 세미원은 그런 사계절의 변화를 가장 아름답게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세미원 여행은 태극 무늬가 그려진 출입문 ‘불이문(不二門)’에서 시작한다. 대승불교 유마경에 나오는 ‘불이법문(不二法門)’에서 따온 문의 이름은 ‘자연과 인간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 실제 문턱을 넘는 순간 공기부터 달라져 발걸음도 마음도 한 박자 느려진다. 한반도 모양으로 꾸민 연못 국사원 양옆으로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 덕분이다. 물 위에는 예쁜 징검다리가 놓였고 푸른 숲과 어우러져 누가 걸어도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을 부린다. 신발이 젖을세라 조심스레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들 웃음소리마저 풍경의 일부가 돼 물소리에 섞여 든다.

 

세미원 징검다리.
세미원 징검다리.

국사원을 지나면 아직 남은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장독대분수를 만난다. 크고 작은 항아리 수백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위로 물줄기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풍경이 시원하다. 장독대 앞에서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의 안녕을 빌던 어머니들의 간절한 마음이 이 항아리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물줄기가 항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고향집 장독대 앞에 서 계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겹친다.

 

세미원 홍련지.
세미원 홍련지.

장독대분수 앞 정자 너머로 페리기념연못이 펼쳐진다. 평생을 수생식물 연구에 바친 세계적인 연꽃 육종가 페리 슬로컴 박사의 가족이 직접 방문해 기증한 귀한 품종의 연꽃이 자라는 곳으로 돌탑, 정자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백련지를 지나면 홍련지가 펼쳐지는데 오솔길을 끝까지 걸어 전망대에 서야 진짜 절경을 만난다. 초록 연잎이 지평선처럼 끝없이 펼쳐진 풍경이 장관이다. 붉은 연꽃은 거의 없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커다란 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연잎 가장자리에 맺힌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세미원 세족대.
세미원 세족대.

 

 

세한정.
세한정.

홍련지 전망대 뒤편은 세족대. 여행자들은 푸른 소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유유자적한 시간을 즐긴다. 아직 짝을 찾지 못해 애타게 울어대는 매미와 물소리가 뒤섞이니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풍경이다. 홍련지 옆엔 거대한 빅토리아수련이 물 위에 둥실 떠 있고 열대수련정원에서는 보랏빛 호주수련이 이국적인 자태로 유혹한다. 

 

세미원 호주수련.
세미원 호주수련.

빨래판 모양으로 바닥을 꾸민 세심로(洗心路)도 만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빨래를 하듯 마음의 때와 먼지를 씻어내라는 뜻을 담았다. 세심로를 끝까지 걸으면 클로드 모네의 정원을 떠올리는 아치형 다리가 놓인 ‘사랑의 정원’이 기다린다. 소나무 한 그루가 마당을 꾸미는 운치 있는 세한정(歲寒庭)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 유배 시절 그린 국보 ‘세한도’의 건물을 정원으로 재현한 공간.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지조와 절개를 말없이 전한다. 

 

배다리.
배다리.

◆물안개 피어나는 두물머리

 

세한정을 지나면 두물머리로 이어지는 배다리(열수주교)가 등장한다. 조선 후기 정조대왕이 경기 화성시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려면 한강을 건너야 했다. 이에 실학자 다산 정약용에게 배들을 엮은 다리를 설계하도록 지시했는데, 배다리는 이런 역사를 재현한 공간이다. ‘열수’는 한강의 옛 이름이자 정약용 선생의 또 다른 ‘호’로 다리 하나에 왕의 효심과 실학자의 지혜가 함께 깃들어 있다. 다리 양 끝에 세워진 홍살문은 왕이 행차하던 신성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길이 200여m의 다리는 전통 조선 형태의 배 44척을 강물 위에 늘어세우고 그 위에 나무 데크를 얹어 만들었다. 물살 저항을 줄이기 위해 배 한 척은 상류를, 다음 배는 하류를 향하도록 서로 엇갈려 배치한 과학적 구조가 돋보인다. 다리 위를 걷는다. 조선 시대 국왕의 군대와 행렬을 지휘·호위하기 위해 사용하던 형형색색의 전통 군사 깃발이 힘차게 나부끼는 풍경은 타임머신을 타고 어가행렬 현장으로 날아가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두물머리 느티나무.
두물머리 느티나무.

다리를 건너 처음 마주하는 높이 30m 느티나무는 수령 400년이 넘는 고목. 일제강점기 이 신성한 나무를 베려던 일본군이 갑자기 손목이 부러지자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원래 도당할배와 도당할매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1970년대 팔당댐 완공으로 도당할매 나무가 물에 잠겨 죽었다는 설화도 있다.

 

유엔 투어리즘이 선정한 ‘베스트 투어리즘 빌리지’ 인증 안내판도 만난다. 이는 유엔관광기구가 2021년부터 운영하는 국제 인증 프로그램으로, 양수리(두물머리)는 지난해 10월 ‘2025 최우수 관광마을’로 공식 선정됐다. 국내에서 여섯 번째이며 이를 기념해 지난 4월 선정 기념비 제막식도 열렸다. 이곳에선 지나온 커다란 느티나무와 그 주변을 덮은 초록 연잎이 아스라한 물빛과 어우러지는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두물머리 메타세쿼이아.
두물머리 메타세쿼이아.

초록 잔디 위에 건장한 사내처럼 근육질 몸통을 자랑하며 선 다섯 그루 메타세쿼이아를 지나면 ‘소원 들어주는 나무’ 두 그루가 여행자를 반긴다. 도당할배와 도당할매는 예로부터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였단다. 어느 날 도당할배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 새로운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를 후손으로 여겨 소원 들어주는 나무로 여기게 됐다. 돌을 쌓고 정성껏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덕에 나무 앞에는 크고 작은 돌탑이 소복이 쌓여 있다. 강 안쪽으로 길게 뻗은 호젓한 흙길을 끝까지 걸으면 마침내 두물경에 닿는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거대한 하나의 한강을 이뤄 나가는 대자연의 풍경이 시원하게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황순원 문학관.
황순원 문학관.

◆소년·소녀 만나는 황순원문학촌

 

두물머리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서종면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은 단편소설 ‘소나기’의 정취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조성된 문학 테마파크다. 실향민 작가 황순원 선생의 실제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군이다. 하지만 소설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단 한 줄 덕분에 양평이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이 깃든 배경 무대가 됐고 제자들과 양평군, 선생이 재직했던 경희대학교가 뜻을 모아 2009년 문학관을 건립했다. 

 

황순원문학관 ‘디지털 소나기 산책길’
황순원문학관 ‘디지털 소나기 산책길’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피했던 수숫단 뭉치 모양을 본뜬 원뿔형 문학관 건물은 지상 3층 규모로 알차게 짜여 있다. 1층 체험교실에서는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문학 그림책을 읽거나 드로잉 체험을 할 수 있다. 2층 1전시실에는 ‘언어를 벼리는 대장장이’로 불렸던 선생의 소박한 서재가 그대로 복원돼 있고, 손때 묻은 만년필 등 유품도 만난다. 특히 어휘를 정교하게 다듬어 쓴 육필 원고 앞에 서면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2전시실은 ‘카인의 후예’ ‘목넘이 마을의 개’ ‘학’ 등 대표작의 장면들을 인물 모형으로 풀어내 눈길을 끈다. 영상체험관 ‘디지털 소나기 산책길’도 꼭 가봐야 한다. 소년과 소녀의 순수함이 페인팅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펼쳐지고 은하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를 건너 판타지아 소나기 체험관으로 들어서면 소나기가 쏟아지는 생생한 빗소리와 아름다운 영상이 펼쳐진다.

 

황순원문학촌 소나기 광장.
황순원문학촌 소나기 광장.

야외로 나서면 진짜 하이라이트가 기다린다. 약 1만4000평의 너른 부지에 조성된 소나기 광장에선 4∼10월 매시 정각마다 특수 노즐 분수에서 인공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방문객들은 광장 곳곳에 세워진 짚더미 수숫단 안으로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잠시나마 소설 속 소년과 소녀가 된다. 소년이 소녀를 등에 업고 건너던 징검다리와 섶다리 개울, 수숫단 오솔길과 ‘너와 나만의 길’, ‘고백의 길’을 천천히 걸으면 첫사랑의 풋풋한 설렘이 자연스레 마음속에 번진다. 늙은 개 신둥이의 이야기가 담긴 ‘목넘이 고개’, 전쟁의 상흔과 우정을 그린 ‘학의 숲’, 장편소설의 배경인 ‘해와 달의 숲’, 별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별빛 마당’까지 부드럽게 이어지는 숲길을 걷다 보면, 작가의 문학 세계 전체를 산책한 듯한 여운이 짙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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