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잠깐의 박수로 충분"…타슈켄트서 온 발레리노 알렉산드르 [인터뷰]

관련이슈 디지털기획

입력 : 수정 :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인쇄 메일 url 공유 - +

구글 선호 매체 등록

타슈켄트에서 서울까지 16년, 4900㎞. 우즈베키스탄에서 열 살에 어머니를 잃고 누나와 남겨진 한 소년이 무용수로 자라 유니버설발레단 무대에 서기까지 걸린 시간과 거리다.

 

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니버설발레단 캐릭터 솔리스트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37). ‘백조의 호수’ 로트바르트, ‘지젤’ 힐라리온, ‘발레춘향’ 변학도, ‘호두까기인형’ 드로셀마이어 등 개성 강한 배역을 도맡아왔다.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강렬한 존재감으로 시선을 끌고 주역 사이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발레리노다.

 

발레단 연습실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카라보스 역할을 연기중인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발레단 연습실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카라보스 역할을 연기중인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캐릭터 솔리스트는 스토리를 끌어올리는, 쉽게 말하면 해설하는 역할이에요. 테크닉과 음악성도 필요하지만 연극과 가까울 만큼 연기력이 필요한 역할입니다.”

 

말 없는 발레에서 손동작과 몸짓, 손가락 하나, 시선과 표정까지 모든 것을 동원해 맡은 인물을 만들어왔다. 2016년 입단해서 2024년 발레단 유일한 캐릭터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그런 세이트칼리예프의 발레 인생은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었다.

 

“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누나랑 저만 남았어요. 보육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엄마 친구가 ‘발레학교에 가서 시험을 한번 보자’고 한 거예요.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어요.”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가 무대 위에서 ‘카라보스’를 연기하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가 무대 위에서 ‘카라보스’를 연기하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아버지가 무용수였지만 부모는 그가 아주 어릴 때 헤어졌다. 아버지에게 춤을 배운 적도, 입학 전 발레를 배운 적도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보육원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두드린 문이 기숙형 국립무용학교였다. 학교는 이후 그의 집이 됐다. 8년 동안 일반 학과와 무용을 함께 배우며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8년 동안 학교가 집이었어요. 선생님들이 부모 역할을 해주셨고 잘 컸던 것 같아요. 친구들, 형들, 누나들도 다 기숙사에서 같이 살았고요.”

 

입학 당시 남학생만 40명가량이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가 줄었다. 잘하는 학생이 연습실 가운데 서는 수업에서 그는 주로 ‘센터’에 섰다고 했다.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수업이 끝난 뒤 교실을 청소하고 꽃에 물을 주는 일도 했다.

 

발레리노를 꿈꾸며 입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춤은 그의 삶이 됐다. 고학년 때부터 현지 국립발레단 무대에 섰고 실력을 인정받아 졸업 전 정식 단원 생활도 시작했다. 당시 교육에서 유난히 강조한 것은 음악과 정확한 안무 그리고 연기였다. 연기가 부족한 학생에게 선생님은 “너희는 극장에서 춤추면 안 돼. 라디오에서 춤춰”라고 혼내곤 했다. 캐릭터 솔리스트가 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가르침이다.

 

한국행은 뜻밖의 기회에서 시작됐다. 오래된 극장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공연을 쉬게 된 시기에 한국에 와 있던 친구가 “롯데월드에서 무용수를 찾는다”고 연락해왔다. 잠시 경험을 쌓고 돌아갈 생각으로 영상 오디션을 봤고 합격했다.

 

롯데월드 무대는 그가 알던 발레와 달랐다. 퍼레이드와 각종 공연을 소화하며 드라큘라 같은 캐릭터부터 ‘꽃보다 남자’를 소재로 한 공연의 구준표 역할, K팝 춤과 립싱크까지 익혔다. 한국어를 거의 못하던 시절에는 노랫말을 통째로 외워 무대에 섰다. 당시 그를 좋아했던 관객 가운데 지금까지 발레 공연장을 찾는 팬도 있다고 한다.

 

첫 계약이 끝날 무렵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연애 중이었고 롯데월드도 계약 연장을 원했다. 한국에 남기로 했다. 다만 발레만큼은 다시 하고 싶었다.

 

“발레는 하고 싶었어요. 잠깐 쉬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진짜 다시 할 거야?’ 하고 여자친구가 물었고 같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발레단을 찾아봤어요.”

 

발레 ‘백조의 호수’ 중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의 ‘로트바르트’.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발레 ‘백조의 호수’ 중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의 ‘로트바르트’.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처음 두드린 유니버설발레단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정통 발레 훈련에서 멀어진 몸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데다 빈자리도 없었다. 다행히 이원국발레단이 그를 받아줬고 약 3년 동안 여러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러면서 유니버설발레단 공연을 꾸준히 찾아보고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2016년 입단했다.

 

“저한테는 마린스키발레단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역사가 깊고 워낙 큰 프로페셔널한 발레단이니까 ‘내가 여기서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완전히 적응하는 데는 1년∼1년 반쯤 걸렸다. “매사에 조심하자. 내 할 일만 잘하자”고 스스로 다잡았다.

 

입단 10년째인 지금 발레단은 제2의 집이 됐다. 그는 “이제 나도 유니버설발레단 긴 역사 안에 아주 조금이나마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클래식하고 아카데믹한 전통과 고전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레퍼토리 속에서 다양한 무대를 경험한 것도 큰 자산이다.

 

특히 캐릭터를 만드는 방식은 배역마다 다르다. ‘백조의 호수’ 로트바르트는 등장부터 무대를 압도해야 한다.

 

“악마 같기도 하고 새 같기도 한 캐릭터예요. 발레리노다운 아름다운 선은 있어야 하지만 무겁고 힘 있고 강력해야 해요.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도 힘이 느껴져야 하죠. 나오자마자 압도해야 하니까요.”

 

로트바르트가 무대를 장악하는 순간을 그는 “‘모든 것이 내 것이다’라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발레단 연습실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카라보스 역할을 연기중인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발레단 연습실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카라보스 역할을 연기중인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지젤’ 힐라리온과 ‘호두까기인형’ 드로셀마이어에는 전혀 다르게 접근한다. 힐라리온은 흔히 악역으로 보지만 그에게는 지젤을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이다.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폭로한 것도 지젤을 해치려 한 행동으로 보지 않는다. 반면 드로셀마이어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오가는 “마술사 같기도 하고 발명가 같기도 한 신비로운 사람”이다. 작품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공연마다 표정과 행동에 조금씩 변화를 준다.

 

“여러 번 보는 관객도 있잖아요. 매번 조금씩 다르게 하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연구해요.”

 

‘발레 춘향’ 변학도를 맡았을 때는 아내, 장모와 함께 남원까지 내려갔다. 춘향 관련 전시를 보고 드라마와 판소리도 찾아봤다. “제가 모르는 한국 역사를 한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러시아말로도 읽어보고 한국말로도 짧게 읽어보고 드라마와 판소리도 봤죠. 거기서 제가 원하는 걸 조금씩 흡수했어요.”

 

가장 특별한 배역으로는 케네스 맥밀런 ‘로미오와 줄리엣’의 티볼트를 꼽았다. 머큐쇼와 싸운 뒤 다시 로미오와 맞붙는 칼싸움이 워낙 격렬해 합을 치밀하게 맞춰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연구 대상이었다.

 

“‘어떻게 죽어야 멋있을까’를 많이 생각했어요. 너무 아침드라마처럼 보이면 안 되잖아요. 영화처럼 됐으면 좋겠어서 옛날 로마 영화도 많이 봤어요.”

 

마지막으로 쓰러질 위치와 큰 동선은 정해져 있지만 그 사이를 어떤 몸짓과 감정으로 채울지는 무용수가 상당 부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세이트칼리예프는 주역과 캐릭터 솔리스트의 차이를 식당에 빗댔다. “주역 무용수는 식당에 가서 한 메뉴를 먹는 것 같아요. 캐릭터 솔리스트는 뷔페에 가서 먹는 거예요.”

 

둘 다 정확한 안무와 작품 틀을 지켜야 하지만 그 안에서 캐릭터 솔리스트가 선택할 수 있는 표현은 더 다양하다는 뜻이다. 대신 무대에 머무는 시간이 짧은 만큼 그 순간 모든 것을 쏟아내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

 

이번에 그가 설 무대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다. 그는 이 작품을 “아카데믹 발레의 교과서”라고 표현했다. 차이콥스키 음악과 마리우스 프티파 안무가 촘촘하게 맞물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이어지는 고전발레 중에서도 특별한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동화책 속 글과 그림으로만 존재하던 세계가 음악과 춤을 만나 실제 무대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점도 매력으로 꼽았다.

 

“책을 읽을 때는 상상 속에 있던 것이 무대에서는 현실이 되는 것 같아요.”

 

춤에도 고전발레 원칙과 기교가 집약돼 있다. 그는 특히 오로라 공주가 여러 구혼자의 손을 차례로 잡으며 한 다리로 균형을 유지하는 ‘로즈 아다지오’를 예로 들었다.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우아함과 균형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발레 ‘백조의 호수’ 중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의 ‘로트바르트’.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발레 ‘백조의 호수’ 중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의 ‘로트바르트’.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한 다리로 서서 남자들이 바뀌어도 아무렇지 않게 균형을 잡아야 해요. 그만큼 테크닉과 힘이 필요한 어려운 작품입니다.”

 

세이트칼리예프가 맡은 배역은 사악한 요정 카라보스다. 오로라 탄생 축하연에 자신만 초대받지 못한 데 분노해 오로라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리는 인물이다.

 

“카라보스도 그렇게 나쁜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요정들은 다 초대했는데 ‘왜 나는 안 불렀어?’ 하는 거죠. 기분이 나빴던 거예요.”

 

그가 보기에 카라보스는 로트바르트 같은 절대적인 악과는 다르다. 자신만 배제됐다는 분노와 모욕감에서 행동이 시작된 인물이라는 해석이다. 이처럼 세이트칼리예프는 선한 인상과 달리 무대에서는 유독 악역을 많이 맡아왔다.

 

“악역을 많이 하다 보니까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이제 악역 아니면 조금 심심할 것 같아요.”

 

그에게 악역 연기의 핵심은 더 사납고 무섭게 보이는 데 있지 않다. 음악과 안무, 몸짓을 통해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익숙한 악역이라도 관객이 공연을 본 뒤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라고 느끼게 하고 싶다고 했다.

 

열 살 소년에게 발레는 선택이라기보다 주어진 삶에 가까웠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무대에 선 지금 그는 오로지 춤이 전부인 삶이 좋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은 여전히 힘들다. 그래도 공연을 마친후 짧은 순간이면 모든 것이 보상받는다. “다른 걸 해볼까 하는 생각은 없어요. 마지막에 관객에게 박수를 받을 때 정말 치료되는 것 같아요. 그 잠깐의 박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10월 2∼4일.


오피니언

포토

수지 '눈부신 미모'
  • 수지 '눈부신 미모'
  • 레드벨벳 웬디 '상큼 발랄'
  • 53세 박주미, '자기관리 끝판왕'다운 군살 없는 몸매
  • 김도연 '완벽한 비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