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기술 도입·인재 양성 등 나서
모리스 창, TMSC창업이 분수령
순수 파운드리 모델 승부수 띄워
‘경쟁하면서 함께 성장’ 산업 문화
한 기업의 성장, 전체로 결합 확장
韓, 첨단기술·제조업 하나로 연결
국가 산업 움직일 플랫폼 만들어야
칩노믹스/ 이은호/ 세종/ 2만1000원
대만은 어떻게 세계 반도체 산업의 심장이 됐을까. 많은 이가 그 답을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에서 찾는다. 하지만 ‘칩노믹스’의 저자인 고려대 경제기술안보연구원 이은호 경제안보센터장은 TSMC는 대만 반도체 경쟁력의 ‘결과’이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진짜 힘은 반도체 설계와 제조부터 장비·부품·패키징·서버·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연결된 산업 생태계에 있다는 것이다.
대만의 오늘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1970년대 초만 해도 대만은 반도체 산업의 불모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부와 산업계는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1974년 타이베이의 한 두유 가게에서 반도체 산업 육성 구상이 논의됐고, 정부는 기술 도입과 인재 양성에 나섰다. 이후 산업기술연구원(ITRI)과 신주과학단지 등이 구축되면서 기업이 성장할 토대가 마련됐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모리스 창의 TSMC 창업이었다.
1987년 창업 당시 56세였던 그는 기존 반도체 업계와 다른 길을 택했다. 직접 제품을 설계하고 생산해 판매하는 대신 ‘남이 설계한 칩을 생산하는’ 순수 파운드리 모델을 제시했다. 설계와 생산을 분리함으로써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이 막대한 생산시설 투자 없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TSMC의 성공은 한 기업의 성공을 넘어 세계 반도체 산업의 분업 구조 자체를 바꿨다.
하지만 대만의 경쟁력을 TSMC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에이서 창업자 스탠 쉬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으로 회사를 세운 뒤 컴퓨터 산업의 변화에 맞춰 사업 영역을 끊임없이 바꿨다. 단순 조립·생산에 머무르지 않고 연구개발과 브랜드 등 부가가치가 높은 영역으로 이동했다. 제조의 중간 단계보다 제품 기획·연구개발과 브랜드·서비스 등 양 끝단에서 더 높은 부가가치가 창출된다는 ‘스마일 커브’ 전략을 보여주는 사례다.
폭스콘도 마찬가지다. 애플 등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제조업체로 성장한 뒤 인공지능(AI) 서버와 전기차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콴타와 위스트론 역시 노트북 제조에서 출발해 AI 서버 분야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 산업에 안주하지 않고 기술과 시장 변화에 따라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하는 기업가 정신이 대만 산업 전반에 자리 잡은 것이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반도체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중소기업들까지 촘촘한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의 패스너 산업이 대표적이다. 볼트·너트·리벳 같은 작은 부품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자동차와 기계, 전자산업을 떠받치는 필수 요소다. 대만은 이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다. 거대한 대기업뿐 아니라 수많은 전문 중소기업이 각자의 영역에서 세계시장을 공략하며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끌어올린다.
이 생태계에는 ‘경쟁하면서도 함께 성장한다’는 산업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기업이 모든 것을 독점하기보다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고 다른 기업과 연결된다. 한 기업의 성장이 다른 기업의 시장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전체 생태계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반도체 제조기업과 팹리스, 장비·소재·부품기업, 패키징 기업이 연결되고, 그 위에 대학과 연구기관, 벤처캐피털, 정부의 산업정책이 결합한다.
기업가 정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도 힘을 보탠다. 대만에서는 창업과 도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 전체의 실패로 낙인찍지 않는 문화가 재도전의 밑거름이 된다.
산업정책의 일관성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국가 차원의 산업 육성 전략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저자는 대만이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바꾸는 데 남다른 저력을 보여왔다고 강조한다. 1965년 미국 원조 중단, 1971년 유엔 축출, 1979년 미국과의 단교, 2000년대 초 경기침체 등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산업단지 조성, 금융 경쟁력 강화, 상속·증여세 인하, 외국인 인재 유치, 고령인력 활용, 외국인 간병인 제도, 신남향 정책 등 제도와 산업의 변화를 추진했다. 위기를 단순히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구조를 바꾸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TSMC를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한국에는 이미 세계적인 메모리 반도체 기업과 자동차·조선·방산·원전 등 강력한 제조업 기반이 있다. 문제는 이 강점을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하는 일이다. 메모리의 경쟁력을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 AI, 서버, 소프트웨어 등으로 확장하고, 반도체를 자동차·조선·방산·원전 등 한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과 연결해야 한다. 반도체가 특정 산업의 부품을 넘어 국가 산업 전체를 움직이는 플랫폼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책의 지속성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정책이 흔들리고 기업이 정책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다면 장기 투자는 불가능하다. 정부가 기업을 대신해 산업을 끌고 가기보다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기술은 기업이 만들지만 경쟁력은 생태계가 만든다. TSMC 같은 세계 1위 기업 하나보다 세계적인 기업이 끊임없이 탄생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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