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마음 움직이게 하고 ‘세상의 일부’ 안도감도 줘
개업하기 전, 일 년쯤 진료를 쉬었던 때가 있다. 정해진 일정도 출근할 곳도 사라지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은퇴하면 나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때 나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도서관 회원증이었다. 집에서 가깝거나 대중교통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도서관을 직장 삼아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다니는 것이다.
둘째는 산책길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 보니 해가 기울 무렵이면 별다른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럴 때 특별한 목적 없이도 밖으로 나가 한 바퀴 걷고 오면 마음이 조금 밝아졌다.
마지막은 단골 가게였다. 집밥을 대신할 백반집 하나, 바게트를 잘 만드는 빵집 하나, 제법 그럴듯한 요리가 당기는 날 주인장과 편하게 몇 마디 나눌 수 있는 푸근한 식당 하나쯤은 있었으면 했다. 프랜차이즈 매장이나 요란한 마케팅으로 손님을 끌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오랫동안 친구처럼 함께할 수 있는 가게이기를 바랐다.
나에게도 그런 곳이 몇 군데 있다. 그중 하나는 ‘오늘의 요리’를 꽤 괜찮은 가격에 내놓는 작은 트라토리아다. 토요일 늦은 오후에 진료를 마치면 그곳에서 음식을 포장해 집에서 먹기도 한다. 최근에는 바게트와 캄파뉴를 아주 잘 만드는 빵집도 발견했다. 휴일이면 집 근처를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그곳에 들러 빵을 사 온다.
돌이켜 보면 내가 바라온 것은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에 나오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마스터가 혼자 꾸려가는 작은 식당, 굳이 사정을 캐묻지 않아도 손님의 마음을 헤아려 따뜻한 음식 한 접시를 내주는 곳 말이다. 나만 이런 공간을 바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마음이 춥고 배고플 때 가고 싶은 곳’이라는 부제가 붙은 ‘심야 치유 식당’은 건국대학교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하지현 교수가 픽션 형식을 빌려 쓴 심리 에세이다.
진료실에서 우울증 환자에게 종종 이런 숙제를 내준다. 집이나 일터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마음에 드는 가게를 하나 찾아보라고 한다. 기운이 빠져 만사가 귀찮더라도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초콜릿이 든 빵이라도 한 입 베어 물라고 한다.
단골 가게에는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우울증이 깊어지면 기운과 의욕이 떨어지고 예전에 즐겁던 일에도 흥미를 잃는다. 자연히 움직임과 만남이 줄어든다. 이럴 때 단골 가게는 집 밖으로 나갈 작고 구체적인 이유를 만들어 준다. “운동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 부담스럽지만 “빵 하나 사 올까”라고 생각하면 현관문을 여는 일이 조금 수월해진다. 가게까지 오가는 짧은 걸음은 활동량을 늘리고, 흐트러진 생활리듬을 되찾게 한다.
단골 가게를 오가는 동안에는 관계도 조금씩 쌓인다. 빵집 주인이 “오늘도 바게트 드릴까요?”라고 묻고, 식당 주인이 말없이 익숙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나를 알아봐 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를 정서적으로 지탱하는 관계가 꼭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골 가게에서 맺은 이런 ‘느슨한 관계’도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일부라는 안도감을 준다.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집과 일터 외에 사람들이 편하게 머물며 관계를 맺는 공간을 ‘제3의 장소’라고 불렀다. 도서관과 공원, 자주 찾는 작은 식당 같은 곳이다. 몸을 움직이게 하고 세상과 이어주는 것, 그것이 우울증 환자에게 단골 가게가 필요한 이유다.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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