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미스 MBC 선발대회 준미스로 강렬한 발걸음을 내디딘 이래, 수십 년간 안방극장을 호령하며 ‘쎈 언니’의 대명사로 군림해 온 배우 이휘향이 카메라 앞에 백발의 치매 노인으로 섰다. MBN 토크쇼 ‘김주하의 데이앤나잇’을 통해 공개된 영화 ‘가족 여행’의 촬영 비화는 단순한 연기 열정을 넘어선 실존적 고백에 가깝다. 찬란했던 전성기를 뒤로하고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곳으로 밀어 넣은 그녀의 행보는, 나이 듦을 지우려 하지 않고 그 위에 삶의 무게를 얹어 예술로 치환하는 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데뷔 초 서울예전 연극과 출신으로 서구적인 용모를 뽐내며 MBC 공채 14기 탤런트로 발탁된 그녀는, 당시 최고 인기 시추에이션 드라마였던 ‘수사반장’의 여순경 역으로 단숨에 이름을 알렸다. 동기생들 중 가장 먼저 고정 배역을 따내며 주목받은 그녀는 1988년 주말극 ‘내일 잊으리’에서 자존심 강하고 세련된 사업가 역으로 연기대상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이어 1989년 ‘달빛가족’의 맏며느리, 1990년 ‘왕조의 세월’ 속 이방자 역과 ‘야망의 세월’의 오윤희 역까지 연달아 홈런을 치며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연기상까지 품에 안았다.
그러나 전성기가 늘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당시 조직폭력배 출신으로 트로트 가수로도 활동했던 故 김두조 씨와 결혼한 사실은 세간의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휘향과 결혼한 이후 조폭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헬스장과 체육관을 운영하며 사업가로 변모했고, 2001년에는 평생 모은 40억원이 넘는 재산을 미션스쿨인 한동대학교에 기증하는 선행을 펼쳤다. 두 사람은 독실한 신앙생활 속에서 깊은 금슬을 자랑했으나, 2005년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최대한 간소하게 장례를 치러 달라는 유지를 받들어 조용히 고인을 떠나보냈다.
비극적인 이별과 굴곡 속에서도 이휘향은 멈추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천국의 계단’ 속 악덕한 계모 태미라 역을 맡아 아역배우의 뺨을 때리는 열연과 압도적인 공포감을 선사하며 ‘악녀 단골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빛과 그림자’, ‘황금가면’, ‘효심이네 각자도생’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강렬한 악역을 소화해 온 그녀이지만, 그 이면에는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탈진이라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약 5, 6년 전부터 마음에 큰 변화가 찾아왔고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지쳐있던 그녀를 다시 일으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연기에 대한 본질적 갈증’이었다. 동료들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이야기하던 중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진심을 깨달은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을 소화해 냈을 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고, 결국 그녀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이번 영화 ‘가족 여행’에서 치매를 앓는 순임 역을 맡은 것은 그 결심의 정점이다.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강렬한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진 그녀는 새하얀 백발의 머리를 천연 제 머리색 그대로 영화 속에 등장시켰다. “나에게 덧칠됐던 모든 것을 다 벗겨버리고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이휘향으로 연기했을 때 누군가에게 기여가 될 수 있는 작품이라면 이게 마지막이어도 좋다”는 각오였다.
실제로 영화 속 치매 환자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그녀는 한 달 동안 부산에 머무르며 요양원과 노래 교실을 오갔고 환자들과 직접 부대끼며 그 삶을 신체에 각인했다. 특히 현장에 있던 스태프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감춘 채 실제 치매 환자의 거친 일상을 몸소 느끼기 위해 직접 기저귀를 착용하고 카메라 앞에 섰던 일화는, 연기를 향한 그녀의 태도가 얼마나 타협 없는 지독함에 기반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거친 파고 속에서도 자신만의 중심을 잃지 않고 오직 묵직한 내공으로 버텨온 시간들.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련해 온 그녀의 46년 연기 궤적은 거창한 수식어가 필요 없다. 슬픔과 기쁨을 오가며 치열하게 자기 삶을 지탱해 온 세월 속에서, 나이 듦을 거부하지 않고 그 위에 품위와 무게를 얹어낸 진짜 프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그리고 그 지독한 열정이 완성해 낸 낯선 얼굴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베테랑이 보낼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찬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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