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고도화 중단 실효 방안 논의”
참여국가 남북·美·中 염두에 둔 듯
北 호응 여부, 당사자국 조율이 관건
2019년 ‘하노이 노딜’ 뒤 동력상실
北 ‘적대적 두 국가’론에 문턱 높아
적대성 줄이고 확전 막는 안전장치
정전체제→평화체제로 전환 구상
野선 “껍데기뿐인 제안 던져” 비판
이재명 대통령은 제81주년 광복절인 15일 “전쟁을 종식하고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여정에 나설 것”이라며 “아주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당사자들 간의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남북 대화가 장기간 끊긴 상황에서 남북뿐 아니라 미국·중국 등 정전체제와 관련된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다자 논의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하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문재인정부가 추진했던 종전선언이 2018년 남북·북미 정상외교를 타고 급물살을 탔다가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동력을 잃은 전례가 있는 만큼 이번 구상 역시 북한의 호응과 미·중을 포함한 당사국 조율이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다. 북한은 이 대통령의 제안이 나온 다음 날인 16일까지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이번 제안을 단순한 종전 논의가 아니라 대북정책을 ‘원칙’에서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청사진의 하나로 제시했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의 체제 존중·흡수통일 불추구·적대행위 불추구’를 천명한 데 이어 올해는 ‘서로를 존중하는 포용적 평화공존’, ‘싸울 필요가 없는 안정적 평화공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책임 있는 평화공존’을 3대 기조로 내놨다. 남북이 적대성을 줄이고 마주 앉는 데서 시작해 위기와 확전을 막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만들고, 종국에는 전쟁을 끝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겠다는 단계적 구상이다.
이 대통령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 경축사에서 “서로에 대한 상호 위협 의사를 내려놓고, 아주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당사자들 간의 논의를 시작합시다”라며 “이를 통해 북의 핵 능력 고도화를 멈출 실효적 방안도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사자’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았지만 남북과 미국, 중국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대통령은 종전에 앞서 “긴장과 갈등을 통제할 제도, 위기와 확전 방지를 위한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선제적이고 지속적인 평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종전이라는 정치적 선언 하나를 앞세우기보다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북핵, 평화체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도록 협상의 입구를 넓힌 셈이다. “페이스메이커이자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라는 언급도 북·미 중재에 머물지 않고 한국이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문재인정부가 종전선언이라는 구체적인 결과물을 앞세웠다면 이 대통령은 선언의 형식과 순서를 못 박지 않은 채 당사국 간 논의부터 시작하자는 데 방점을 찍었다.
◆文 종전선언, 하노이 ‘노딜’ 뒤 동력 상실
다자 협의를 통한 종전 구상은 문재인정부에서도 추진됐다. 문재인정부는 종전선언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촉진할 정치적 조치이자 평화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2018년 4·27 판문점선언에서 남북은 그해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해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이어지면서 관련 논의는 탄력을 받았다.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는 북한이 미국의 상응 조치를 전제로 영변 핵시설의 영구 폐기 의향까지 밝혔다.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바탕으로 종전선언을 거쳐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간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끝나면서 흐름이 끊겼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 범위와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 수준을 놓고 양측이 접점을 찾지 못했고, 이후 북·미 협상과 남북관계가 함께 얼어붙으면서 종전선언을 추진할 외교적 공간도 크게 좁아졌다. 종전선언 자체보다 북한이 요구하는 안전보장·제재 완화와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조치를 어떤 순서와 수준으로 주고받을지가 더 큰 벽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21년 9월 유엔총회에서 다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됐음을 함께 선언하자”고 제안했다. 중국은 지지 의사를 밝혔고,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도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김 부부장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과 ‘이중기준’ 철회를 선결조건으로 내걸었고 실제 당사국 간 협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53년 정전협정에는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중국인민지원군이 서명했고 한국은 서명 당사자가 아니었다. 문재인정부가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을 제시했던 것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면 남북 합의뿐 아니라 미·중을 포함한 관련국의 조율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대통령이 이번에는 참여국을 구체적으로 못 박지 않고 ‘당사자들 간 논의’라고 표현한 것은 협상 형식과 참여 범위에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해석된다.
◆北 ‘적대적 두 국가’… 문턱 더 높아져
이번에는 출발 조건이 2018년보다 더 까다롭다. 당시에는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대화가 복원되고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까지 이어지는 대화의 동력이 있었다. 반면 지금은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며 남측과의 대화 자체에 선을 긋고 있다. 핵무력을 국가전략의 핵심에 놓은 북한은 비핵화를 협상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북·러 협력 확대와 미·중 전략경쟁까지 겹쳐 다자 협상을 둘러싼 외교 환경도 복잡해졌다.
북한은 16일까지 이 대통령의 제안에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관영매체도 관련 내용을 언급하지 않은 채 ‘조국해방의 날’ 내부 행사 소식만 전했다. 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광복절을 맞아 축전을 보내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보낸 답전에서 “공동의 투쟁사와 친선의 고귀한 전통을 연면히 이어온 조러관계의 보다 훌륭한 미래를 확고히 내다볼 수 있게 된 데 대하여 항시 자긍스럽게 여기고 있다”며 북·러 관계를 부각했다.
이 대통령이 ‘비핵화’보다 “북의 핵 능력 고도화를 멈출 실효적 방안”을 먼저 언급한 것도 이런 현실과 맞닿아 있다. 완전한 비핵화를 당장의 협상 입구로 제시하기보다 추가적인 핵 능력 고도화를 멈추는 문제부터 논의하면서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유도하려는 단계적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북한이 핵 보유를 전제로 협상에 나서려 할 경우 이를 미국이 어느 수준까지 수용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북한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는 중국의 역할이 주요 변수로 꼽힌다. 최근 북한과 관계 개선에 나선 중국이 북한의 대화 복귀를 유도하고 북·미 간 입장차를 좁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19일 방한할 예정이다. 이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도 한·중 간 주요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중국의 참여가 곧 북한의 대화 복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양국을 같은 평화체제 논의 틀에 묶어야 하는 데다 미국과는 종전 논의가 한·미동맹과 대북 억지, 비핵화 원칙에 미칠 영향도 조율해야 한다.
야당은 북한이 핵 능력을 계속 키우는 상황에서 정부가 평화 조치를 앞세우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선제적·지속적 평화 조치는 결국 우리만 무장해제하겠다는 안보 포기 선언”이라고 주장했다. 최보윤 수석대변인도 “북한이 핵 능력을 고도화하는 상황에서도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당사자 간 종전 논의’와 ‘3대 평화공존’이라는 껍데기뿐인 제안을 던졌다”고 했다.
김태형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종전선언을 위한 우리 정부의 운신의 폭이 넓지 않고, 북한은 비핵화가 언급만 돼도 대화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왕이 부장의 방한 등을 계기로 북한, 북핵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인식차를 좁히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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