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성장은 함께 살아남기 위한 전략
성장의 과실, 공급망 전반으로 흘러야
초과이익공유제 뿌리내리지 못한 건
대기업의 자발적 시혜 의존했기 때문
납품단가 연동제 엄격한 법제화 중요
반도체 원청 내부자끼리 성과급 독식
부품·소재 희생 외면… 산업기반 약화
GPU 등 AI 인프라 공공화 구축 필요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이 15년 넘게 ‘동반성장’을 이야기해 온 이유는 이 한마디에 압축돼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급망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만큼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논리다. 정 이사장은 지난달 31일 서울 관악구 동반성장연구소 사무실에서 진행한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반성장은 약자를 위한 시혜가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며, 성장의 과실이 공급망 전반으로 흘러야 저성장과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총장, 국무총리를 지낸 그는 ‘동반성장 전도사’로 불린다. 2010년 초대 동반성장위원장을 맡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한국 경제의 핵심 의제로 끌어올렸다. 이듬해에는 대기업이 목표보다 많은 이익을 거뒀을 때 그 성과를 함께 만들어낸 협력 중소기업과 일부를 나누는 ‘초과이익공유제’를 처음 제안했다. 정부가 기업의 돈을 거둬 불특정 다수에게 나눠 주는 재분배 정책이 아니라, 생산에 참여한 기업들이 미리 정한 원칙에 따라 성과를 나누자는 시장 안의 상생모델이다.
“원래 자율주의자였다”고 한 정 이사장은 기업이 자발적으로 협력사와 이익을 나누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었는데 현실은 기대와 거리가 멀었다고 꼬집었다. 그는 “저성장 시대일수록 가계와 중소기업의 소득을 늘려서 내수를 진작시키는 분배가 곧 강력한 성장 동력이 된다”며 “이제는 적절한 이익 공유를 기업의 선의에 맡길 게 아니라 법과 제도로 강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이사장은 최근 불거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규모 성과급 논란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바라봤다. 성과를 낸 노동자에게 보상을 주는 것 자체는 문제삼지 않았지만, 반도체 호황의 과실을 원청 내부 구성원끼리 차지하려는 것에 대해선 “과유불급”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대기업 노조를 향해 “수많은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하청 근로자 등 협력업체 노동자들도 생각해야 한다”며 “생산라인을 함께 떠받친 협력사와 근로자들의 몫을 외면한 채 내부 보상만 키우면 결국 산업 생태계 전체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ㅡ한국 경제의 큰 위기를 꼽는다면.
“경제 선순환 구조의 붕괴와 그로 인해 촉발된 극단적 양극화라고 본다. 소수의 글로벌 대기업은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하며 천문학적 규모의 사내유보금을 축적하고 있는 반면, 중소기업과 서민 가계는 만성적인 유동성 위기와 저임금 구조에 갇혀 있다. 대기업 창고에는 돈이 넘쳐나는데, 시장 바닥에는 돈이 돌지 않는 소위 ‘돈맥경화’ 현상이 만연하다. 이것이 저성장을 고착화하는 핵심 기제로 작용하고, 나아가 ‘열심히 땀 흘려 노력하면 정당한 보상을 받고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사회적 신뢰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ㅡ과거에는 ‘먼저 성장한 뒤 나누자’고 했다.
“선(先) 성장 후(後) 분배’라는 낡은 공식은 이미 역사적 수명과 효용이 다했다. 지난 수십년간 국가의 국내총생산(GDP)과 대기업의 매출은 우상향 궤적을 그리며 팽창했지만, 중소기업의 이익과 일반 가계의 실질 가처분소득 증가율은 이를 한참 하회하며 괴리가 심화됐다. 이제는 가계와 중소기업의 소득을 늘려 내수를 진작시키는 분배를 강력한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ㅡ초과이익공유제 취지를 정책적으로 잘 살리지 못했다.
“전직 동반성장위원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제가 초과이익공유제를 사회적 의제로 던졌을 때 재계 일각에서는 ‘반시장적 공산주의 발상’이라고 맹비난하며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그러나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흥행 수익을 제작에 참여한 이들과 나누고,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생태계 참여자들과 이익을 공유한다. 롤스로이스나 크라이슬러 등의 기업도 이를 실행하고 있다. 이 제도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근본 원인은 법적?제도적 규범으로 강제하지 못한 채 대기업의 자발적 시혜나 도덕적 선의에 의존하는 ‘가이드 라인’이나 ‘권고’ 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ㅡ동반성장을 위해 시급하게 도입해야 할 제도는.
“납품단가 연동제의 엄격한 법제화다. 예컨대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철광석, 구리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을 때 힘없는 하청업체가 원가 상승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 적자를 내며 부도로 내몰리는 비합리적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개별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대등한 단가 협상을 벌이는 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조차 되지 못한다. 동종업계 중소기업들의 공동 교섭권을 폭넓게,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ㅡ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막대한 내부 성과급 지급 논란에 대한 생각은.
“시야를 넓혀 산업 생태계 전체를 조망해 본다면 온전히 ‘정당한 보상’이라 평가하기 어렵다. 그(반도체 산업의) 화려한 성취 이면에는 열악한 작업환경을 묵묵히 감내하며 첨단 생산 라인이 멈추지 않도록 지탱해 온 2차, 3차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피땀어린 헌신이 깔려 있다. 이처럼 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유기적인 협력으로 창출된 거대한 부가가치를, 오직 원청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본사 내부자들끼리 독식하는 구조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보상이 아니라 지배적 지위에 기인한 ‘지대 추구’ 행위에 가깝다. 외부 생태계의 희생을 담보로 한 내부자들만의 독식 보상 시스템은 결국 부품 및 소재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장기적으로는 반도체 산업 전체 기반을 무너뜨리게 될 수 있다.”
ㅡ대기업 노조들이 요구하는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 사회의 임금 구조상 최상위 1% 소득 계층에 속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내세우는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 요구가 오직 기업 내부 근로자들의 배분 몫을 극대화하는 데만 매몰돼 있는 점은 우리 노동운동의 구조적 한계와 이기주의를 여실히 드러낸다. 원청 노조가 내부 몫을 극대화할수록 사측은 재무적 비용 부담을 결국 하청업체의 납품 단가 인하로 상쇄하려는 유인에 직면하게 된다.”
ㅡ성과급을 제한하면 인재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진정한 핵심 인재 확보는 스톡옵션 부여나 특수연구직군에 대한 이른바 ‘핀셋 보상 제도’를 통해 매우 정교하게 해결해야 하는 수준 높은 인사경영 과제다. 인재 유출 방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방패삼아 본사의 수만명 임직원이 거액의 성과급 잔치를 향유하면서, 정작 생태계를 떠받치는 협력업체의 적정 이윤을 외면하고 쥐어짜는 행태는 어떠한 경제적 논리로도 합리화하기 어렵다. 반도체 공장을 24시간 가동하기 위한 막대한 전력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 발전소를 짓고 고압 송전탑을 세운다. 그만큼 지역 주민들이 환경적 고통을 감내한다. 또 어마어마한 양의 공업용수가 지원되며, 이른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을 통해 매년 엄청난 법인세 감면 혜택도 받는다. 요컨대, 첨단산업의 육성은 국민 세금과 사회적·환경적 인프라 등 대규모 공공 자원이 동원된 거대한 ‘국가적 동반성장 프로젝트’인 셈이다. 따라서 이들 기업이 초호황기에 향유하는 초과 이익의 일정 부분은 국민 생태계에 환원돼야 한다.”
ㅡ원청 기업이 협력사 근로자에게 직접 성과급을 주는 것과 협력업체에 이익을 배분하는 방식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가.
“대기업이 하청 근로자 개인에게 직접 금전적 보상을 주는 것은 겉보기에는 상생 같지만, 실제로는 하청업체의 독자적 경영권과 노사 교섭 질서를 무력화시키는 행위다. 생태계가 창출한 초과 이익은 마땅히 먼저 대기업과 생산과정에 참여한 하청기업에 귀속돼 해당 중소기업이 경영적 판단과 내부 논의를 거쳐 재원을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이 공유하는 이익이 1차 협력사뿐 아니라 2·3차 등 전 협력사와 구성원에게 적절히 돌아가도록 하는 방안이 필수적이다.”
ㅡ인공지능(AI)시대에 데이터와 알고리즘, GPU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기업 영업 비밀을 개방하라는 급진적인 의미가 아니다. 제가 새로운 시대의 동반성장 의제로 제안한 것은 AI경제 생태계의 근간이 될 기초 자산을 소수가 독점하지 말고 혁신 공공재로 널리 개방하자는 뜻이다. 예를 들어 통신사나 IT기업이 갖고 있는 완벽하게 비식별화 가공을 거친 유동 인구, 교통, 상권 흐름 자료 등이다. 또 AI를 학습시키는 방대한 데이터와 고성능 GPU칩이 수만개씩 엮인 막대한 연산능력은 국가 전력망에 비견되는 핵심 사회간접자본이다. 청년 혁신가나 벤처기업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시장에 진입조차 할 수 없다. 따라서 국가가 자금력이 부족한 연구진이나 기업이 수도나 전기를 쓰듯 사용한 만큼 공공요금을 지불하고 안정적으로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의 공공화’를 구축해야 한다.”
ㅡ‘왜 열심히 일해야 하느냐’고 묻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청년들의 가슴속에 맺힌 질문을 마주할 때면 기성세대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일원이자 평생을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해 온 교육자로서 무거운 책임감과 부끄러움을 통감한다. 여러분이 흘리는 땀방울과 노력이 부조리한 시장에서 헐값에 배신당하지 않도록 분배의 룰을 고치는 데 전력을 다하려고 한다. 그러니 제발 포기하지 말고 현실에 맹렬히 분노하되 여러분 세대만의 혁신과 꺾이지 않는 도전을 지속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은…
●1947년생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사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 박사 ●한국금융학회 회장 ●서울대학교 제23대 총장 ●한국경제학회 회장 ●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 ●대한민국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일본 동경대학 총장자문위원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2011년 3월∼)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2012년 6월∼)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이사장(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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