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솟은 고층 빌딩 '맨해튼 플라자'. 공연예술 종사자를 중심으로 입주민을 받는 임대주택이다. 맨해튼 플라자를 둘러싼 거리는 불온하나 창조적인 에너지가 끓어넘치고 그래서 '헬스키친(지옥의 주방)'으로 불린다. 이곳에서 자란 혼혈 소녀 앨리는 싱글맘 저지의 과보호가 불만이다.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로 딸과 떨어져 지내는 아버지 데이비스는 앨리와 저지를 사랑하지만 그들의 삶을 책임질 만큼 헌신적이지는 않다. 연상의 흑인 청년 넉과 첫사랑에 빠진 앨리는 엄마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방황하던 그는 아파트 안 다목적 연습실 '엘링턴 룸'에서 피아니스트 미스 라이자 제인을 만나 음악을 배우고 자신이 이어갈 흑인 음악의 계보를 깨닫는다.
브로드웨이 개막 2년여 만에 한국에 건너온 '헬스키친'은 흥행작이 갖춰야 할 덕목을 두루 갖췄다. 음악과 춤, 배우와 서사, 무대와 음향이 고르게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육각형' 뮤지컬이다. 팝스타 앨리샤 키스의 히트곡으로 그의 성장 경험을 각색한 주크박스 뮤지컬이지만 스타의 성공담을 시간순으로 늘어놓는 전기극과는 거리가 멀다. 앨리샤 키스라는 이름을 지우더라도 한 줄씩 밑줄 그으며 읽는 소설처럼 관객을 몰입시키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뼈대는 익숙하다. 과보호하는 엄마와 이에 저항하는 사춘기 딸의 갈등은 만국 공통의 풍경이다. 통제와 반항으로 부딪친 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주는 스승, 첫사랑과의 성숙한 이별, 그리고 부녀의 사연이 포개진다. 웰메이드 가족극이자 성장극이며 음악극이다.
익숙한 이야기에 무게를 더하는 것은 인종 문제다. 앨리는 백인 엄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의 연인과 스승도 흑인이다. 배우의 피부색만으로 인종 구도를 곧바로 식별하기 어려운 한국 공연에서는 온전한 감상에 불가피한 제약이 생기지만 대사와 상황, 의상과 음악이 그 차이를 대신 전한다.
공연의 가장 큰 힘은 음악이다. 팝스타의 히트곡이 낭비 없이 상황과 인물의 감정에 맞물려 제자리를 얻었다. 때로는 강렬한 저음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때로는 발장단을 맞추게 한다. 도입부부터 인상적이다. 앨리가 고층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각 층에서 오페라와 재즈, 메렝게와 클래식 피아노가 흘러나온다. 거리로 나서면 양동이를 두드리는 드러머와 댄서, 이웃들이 합세해 '더 고스펠'을 펼치는데 리듬 앤드 블루스의 소울이 넘쳐난다. 앨리가 이미 거대한 음악적 공동체 안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앨리와 라이자 제인의 첫 만남이다. 엄마와 다툰 앨리가 집을 뛰쳐나오지만 비가 쏟아진다. 엘링턴 룸으로 피신한 그는 라이자 제인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에 붙들린다. 라이자 제인은 앨리에게 앉아서 보고 듣고 배우라고 이른다. 이어지는 음악 속에서 앨리는 평생 보아온 도시의 색채와 소리를 새롭게 감각한다. 라이자 제인은 앨리에게 선대의 역사를 강조한다. 플로렌스 프라이스·마거릿 본즈·헤이즐 스콧 등 흑인 여성 음악가의 소울을 앨리에게 세례하듯 가르친다. 자신이 겪은 인종차별을 털어놓으며 고통을 음악으로 바꾸고 계속 연주하라고 당부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격언은 맨해튼에서도 다르지 않다. 문지기 레이와 이웃들이 앨리를 함께 지켜보고 라이자 제인은 정체성을 고민하는 소녀에게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다.
'헬스키친'은 만듦새도 훌륭하다. 특히 음향은 작품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베이스 음압이 몸으로 느껴질 만큼 풍부하면서도 배우의 노래와 가사가 또렷하게 들렸다. 크게 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소리 하나하나를 분리해 전한다. 무대와 춤도 음악에 빈틈없이 맞물린다. 철골 구조물은 맨해튼 플라자의 수직성을 드러내고 그 안에 자리한 밴드는 아파트 전체가 음악으로 숨 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스트리트 댄스를 바탕으로 한 군무는 음악의 에너지를 몸으로 번역한다.
앨리 역을 맡은 김수하는 마치 자기 옷을 입은 것처럼 연기한다. '렌트'·'하데스타운'·'스웨그에이지'에서 이미 역량을 증명한 뮤지컬 배우다. 이 작품에선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탁월한 가창으로 앨리샤 키스의 노래를 원래 자신의 노래처럼 들려줬다. 첫사랑을 스스로 정리하고 홀로 자신을 키운 엄마와 제 삶에 더 충실했던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앨리의 궤적도 설득력 있게 그렸다. 라이자 제인 역을 맡은 정영주는 소울 충만한 노래와 절도 있는 연기로 극의 중심을 단단히 받쳤다. 앨리의 재능을 알아보는 데 머물지 않고 음악가로서 지켜야 할 태도와 역사를 가르치는 스승의 권위를 묵직하게 구현했다.
음악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찾고 엄마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줄 알게 된 소녀의 이야기는 익숙한 성장담이다. 이를 비범하게 만드는 것은 그 곁을 채운 사람들과 음악이었다. 서울 GS아트센터에서 11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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