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건넨 종이포엔 씨앗 가득
꽃 가꾸기나 詩를 함께 읽는 건
타인 마음 머물 자리 키우는 일
올여름 나는 새 시집을 들고 지방에서 북콘서트를 몇 차례 열었다.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이지만, 각지에서 낭독회를 열 때마다 뜻밖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 주었다. 부산 영광도서 문화홀이나 대구 정호승 문학관 다목적홀에서 만난 독자들의 마음은 오래 남았다. 시는 활자로 읽을 때와는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시인의 목소리와 창작의 배경을 만나는 순간, 시는 독자에게 조금 더 입체적인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러나 여러 북콘서트 중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을 자리는 뜻밖에도 참석 인원이 가장 적었던 곳이었다. 속초에서 ‘한 사람을 위한 낭독회’를 열었다. 대학 졸업 즈음 쓰러져 휠체어를 타게 된 친구가 시 콘서트를 보고 싶어 했다. 서울과 대구에서 먼 길을 달려온 고마운 분들도 있었고, 속초 인근에서 찾아온 이도 있었다. 영랑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4층 라이브카페.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이들의 마음은 모두 비슷했다. 시라는 매개로 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각자의 자작시로 마음을 전하는 시간은 무엇보다도 뜻깊고 귀했다.
이날이 꿈만 같다고 말한 그 친구는 애송하는 정호승 시인의 ‘서울의 예수’를 암송했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우리는 시를 읽어 주러 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우리를 읽고 있었다. 그를 위한 자리였지만, 위로를 받은 것은 우리 모두였다. 그날 문득 알았다. 문학은 많은 사람 앞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이 기다리는 자리까지 기꺼이 찾아갈 수 있을 때 문학은 비로소 사람의 얼굴을 갖는다.
그런 마음은 뜻밖에도 우리 아파트에도 피어 있었다. 이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단지는 낡고 황량했다. 그런데 놀이터 가장자리에는 접시꽃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접시꽃만은 이곳이 살 만한 곳이라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나는 접시꽃 덕분에 이 아파트에 정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아파트 입구에서 경비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유난히 붉은 겹접시꽃을 가리켰다. “저 겹꽃 가까이 가서 꼭 보고 가요.” 가까이 다가가니 꽃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저 꽃은 키가 5미터까지도 자란대요.” 경비 아저씨는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꽃보다 먼저 사람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꽃의 키를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꾸 생각해 보니 꽃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꽃을 조금씩 더 자라게 하는 것 같았다. 해마다 물을 주고 풀을 뽑으며, 지나가는 사람 한 명이라도 더 가까이 와서 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꽃의 줄기를 조금씩 더 밀어 올렸을 것이다. 그는 지하 창고에 다녀오겠다며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꼬깃꼬깃 접은 종이포 몇 개를 내게 건넸다. ‘흰색’, ‘분홍’, ‘검정’, ‘빨강’, ‘노랑’이라고 적힌 것을 하나씩 내 손에 쥐여 주며, “다섯 가지 색깔 다 챙겼어요!” 하고 덧붙였다. 직접 받아 둔 접시꽃 씨앗이었다.
생각해 보면 속초에서도, 우리 아파트에서도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같은 것이었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다. 한 사람을 위해 시를 읽어주고 싶은 마음, 꽃이 예쁘게 핀 자리를 함께 보자고 손짓하는 마음.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간다. 영랑호를 바라보며 ‘서울의 예수’를 낭송하던 그 친구에게서, 그리고 놀이터 옆에서 접시꽃의 키를 자랑하던 경비 아저씨에게서, 나는 같은 마음을 보았다. 꽃을 키우는 일과 시를 함께 읽는 일은 결국 다른 사람의 마음이 머물 자리를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 문학도 꽃도 결국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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