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에 질문하다/윤경림·김민성/굿모닝미디어/3만3000원
‘위스키에 질문한다’는 한국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K-Whisky’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한 프로젝트이자, AI 시대의 새로운 창조 방식을 탐구한 실험 보고서다. 단순한 위스키 입문서도, 증류 기술 해설서도 아니다. 전통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과학과 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의 힘으로 탐색한 기록이다.
흥미로운 점은 두 저자는 위스키 장인이 아니라 ICT와 데이터 과학 분야에서 활동해 온 전문가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전통이 없다는 것은 새로운 전통을 만들 자유가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수백 년 역사의 스카치위스키를 모방하기보다 한국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을 결합한 새로운 증류주를 설계하려는 것이다.
책의 핵심 개념은 위스키를 ‘액체 소프트웨어(Liquid Software)’로 바라보는 발상이다. 위스키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과 알코올은 운영체제(OS)이고, 실제 개성을 결정하는 것은 1% 남짓한 향기 분자와 화학 성분이라고 설명한다. 이 1%를 데이터와 과학으로 분석하면 위스키 역시 설계 가능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 분자생물학과 뇌과학, 감각과학까지 동원된다. 사람마다 위스키 맛을 다르게 느끼는 이유를 후각 수용체 유전자와 미각의 개인차에서 찾고, 향이 기억을 불러오는 ‘프루스트 효과’를 통해 위스키가 단순한 술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저장하는 매개체임을 설명한다. 감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위스키를 과학의 언어로 해석해낸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K-Whisky는 단순히 한국산 보리를 사용하는 술이 아니다. 한국인의 정서를 향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메밀의 길고 쌉쌀한 여운은 ‘한(恨)’, 찹쌀의 부드러운 단맛은 ‘흥(興)’, 귀리와 조가 주는 담백한 균형감은 ‘절제(節制)’를 상징한다. 추상적인 감정을 향미 설계로 연결한 시도는 기존 위스키 서적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접근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조선 시대 소줏고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류 스틸(Hanryu Still)’ 개념이다. 저온 예비 증류와 진공 증류를 결합해 곡물의 섬세한 향을 살리고, 한국의 큰 일교차를 숙성의 장점으로 활용하며, 옹기와 신갈나무 오크통을 함께 사용하는 숙성 방식까지 제안한다. 아직 산업적으로 구현된 기술은 아니지만 “한국에도 한국만의 위스키 제조 철학이 가능하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책은 이론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자들은 양평에 작은 파일럿 양조장을 마련해 직접 술을 빚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기록한다. 설계대로 되지 않는 발효 과정, 예상과 다른 향의 변화, 장비와 수질의 변수까지 숨김없이 드러낸다. 율무를 증류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코코넛 향을 발견하는 장면은 연구노트이자 탐험기의 재미를 함께 전한다.
이러한 실패의 기록은 오히려 책의 신뢰를 높인다. 완벽한 성공담보다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는 과정 자체가 혁신의 본질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AI와 인간의 협업이다. 이 책에서 AI는 단순한 글쓰기 도구가 아니라 공동 연구자다. 인간은 질문을 만들고 방향을 설계하며, AI는 방대한 정보를 분석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제안한다. 저자들은 이를 ‘창작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전문가만 새로운 지식을 만들던 시대에서 AI와 함께 누구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시대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셈이다.
한국에는 아직 세계적인 위스키 브랜드가 없다. 그러나 ‘위스키에 질문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전통은 오래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첫걸음을 내디뎠기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위스키를 만드는 법보다 ‘새로운 전통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보여준다. 술에 관한 책인 동시에 혁신과 창조, 그리고 AI 시대 인간의 역할에 관한 탐구서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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