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9000 가정한 매도 추정치는 최대 74조4000억원
매매 재개 후 사흘간 ‘연기금 등’ 순매도 2158억원에 그쳐
“74조 매도폭탄 쏟아진다고?”
코스피가 오르면 주식을 팔지 말라고 한다. 떨어지면 지수를 떠받치라고 요구한다. 증시가 출렁일 때마다 투자자들의 시선은 1670조원이 넘는 기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으로 쏠린다. 국민연금이 증시 등락의 원인이자 해법으로 거듭 소환되자 기금 수장이 직접 선을 그었다.
2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지난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승전…국민연금?’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국민연금의 투자는 증시 부양이나 주가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증시 안전판’이나 ‘증폭기’ 역할을 하기 위한 투자도 아니다”며 “국민연금의 역할은 시장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노후를 위해 장기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23일에도 후속 글을 올려 수익성·안정성·공공성·유동성·지속가능성·운용독립성 등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6대 원칙을 다시 강조했다.
그는 “국민연금에 증시 등락에 따라 증시 ‘안정판’이나 ‘균형추’ 역할을 요구하거나 ‘증폭기’ 역할을 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국민연금의 역할은 시장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노후를 위해 장기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이사장이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운용을 둘러싼 논란에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이달 들어 세 번째다.
앞서 지난 1일에는 ‘국민연금 리밸런싱과 74조 매도폭탄의 진실’이라는 글을 통해 “일각에서 제기되는 74조원은 어떻게 계산했는지 모르지만 터무니없는 숫자”라고 반박했다. “국민연금이 리밸런싱에 들어가더라도 ‘폭탄’이 될 가능성은 제로”라고도 했다.
국민연금은 코스피 움직임만 보고 국내주식을 한꺼번에 사고파는 기관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1670조 기금 중 국내주식 419조5000억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 전체 자산은 1670조7000억원이다. 이 가운데 국내주식 투자액은 419조5000억원으로 전체의 25.1%를 차지했다.
해외주식은 604조5000억원, 국내채권은 293조6000억원, 해외채권은 103조1000억원, 대체투자는 245조7000억원이다. 단기자금은 3조6000억원, 복지·기타 부문은 1조5000억원이다. 해당 수치는 잠정치로, 항목별 금액을 반올림해 합계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기금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비중 1%포인트의 차이도 단순 환산하면 약 16조7000억원에 달한다. 물론 국내주식 비중이 목표치보다 1%포인트 높다고 해서 같은 금액의 주식을 곧바로 팔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가뿐 아니라 환율과 금리, 채권 가격, 해외주식과 대체투자의 평가액도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시장을 흔든 ‘74조원 매도설’ 역시 일부 증권사가 여러 가정을 토대로 산출한 추정치다. 신영증권은 코스피가 9000에 도달하면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이 30.8%까지 높아질 것으로 가정했다.
국내주식 목표 비중 20.8%에 전략적 자산배분(SAA) 허용 범위 6%포인트를 더한 26.8%를 상단으로 적용하면 매도 추정액은 74조4000억원이 된다.
전술적 자산배분(TAA) 범위를 1%포인트 활용해 상단을 27.8%로 높이면 추정 매도액은 55조9000억원, 2%포인트를 모두 활용해 28.8%까지 허용하면 37조3000억원으로 줄어든다.
74조4000억원은 코스피 9000, 국내주식 비중 30.8%, TAA 미활용이라는 조건을 모두 적용한 최대 시나리오다. 국민연금이 매도를 결정했거나 확정한 물량이 아니다.
국민연금은 실제 SAA 허용 범위를 공개하지 않는다. 신영증권이 적용한 SAA 6%포인트와 TAA 2%포인트는 시장에 알려진 수치를 토대로 설정한 가정값이다. 지수와 환율, 다른 자산 가격의 움직임이나 실제 허용 범위가 달라지면 매도 추정액도 바뀐다.
◆연말 목표 20.8%로 상향…매도 속도도 낮췄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1월 26일 국내주식 시장의 변동성을 고려해 SAA 허용 범위를 벗어났을 때 시행하는 리밸런싱을 한시적으로 유예했다.
지난 5월 28일에는 올해 말 국내주식 목표 비중을 14.9%에서 20.8%로 5.9%포인트 높였다. 상법 개정 등에 따른 국내 증시의 구조적 변화 가능성과 이미 높아진 국내주식 비중을 반영한 결정이다.
기금운용위원회는 목표 비중 조정 이유로 기금의 장기 수익성과 안정성 제고, 리밸런싱에 따른 시장 영향 완화를 들었다. 새 목표 비중은 리밸런싱 유예가 종료된 6월 말부터 적용됐다.
20.8%는 올해 말 목표 비중이다. 매일 맞춰야 하는 고정 상한선은 아니다. 시장 가격이 움직이면 실제 비중은 목표치와 달라질 수 있으며, 정해진 허용 범위 안에 있으면 목표 비중을 지킨 것으로 본다.
기금운용위원회는 국내주식의 SAA 허용 범위도 한시적으로 확대했다. 다만 기금운용의 공정성과 금융시장 안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범위는 공개하지 않았다.
리밸런싱 속도도 낮췄다. 공식 발표에는 “일일 최대 리밸런싱 규모를 축소했다”고만 나와 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당월 10영업일간 최대 0.50%포인트 조정’에서 ‘당월 20영업일간 최대 0.25%포인트 조정’으로 규칙이 바뀐 것으로 전해졌다.
매매 기간을 늘리는 동시에 최대 조정 폭을 낮춰 하루 시장에 나오는 물량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구체적인 집행 시기와 규모, 종목은 공개되지 않는다.
◆시장 충격 완화와 주가 방어는 다른 문제
김 이사장이 23일 후속 글에서 다시 제시한 국민연금 기금운용 원칙은 수익성·안정성·공공성·유동성·지속가능성·운용독립성 등 여섯 가지다.
공공성 원칙은 막대한 기금 규모가 국가경제와 국내 금융시장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하도록 규정한다. 유동성 원칙도 투자자산을 처분할 때 국내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할 방안을 미리 마련하도록 하고 있다.
시장 충격을 줄여야 한다는 원칙이 특정 지수나 개별 종목의 주가를 떠받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운용독립성 원칙에는 다른 목적을 위해 기금운용 원칙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국민연금은 국내주식뿐 아니라 해외주식과 국내외 채권, 대체투자에 장기 분산 투자한다. 국내 주가만이 아니라 금리와 환율, 자산별 위험과 기대수익률을 함께 따져 전체 기금의 수익성과 안정성을 관리한다.
김 이사장은 “국민연금은 올랐다고 바로 팔아서 이익을 실현하고 떨어졌다고 바로 사들이는 기관이 아니다”며 “대한민국의 경제와 산업, 기업의 성장과 함께하는 ‘유니버설 오너’로서 국민의 이익과 노후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국민연금의 사명”이라고 밝혔다.
실제 리밸런싱이 재개된 7월 1일부터 3일까지 ‘연기금 등’은 유가증권시장에서 2158억원을 순매도했다. 코스콤 CHECK가 한국거래소와 넥스트레이드 거래를 합산한 수치다.
첫날에는 2181억원을 순매도했지만 2일에는 535억원으로 규모가 줄었다. 3일에는 558억원 순매수로 돌아섰다.
한국거래소 거래만 보면 이 기간 ‘연기금 등’이 가장 많이 판 종목은 삼성전자로, 순매도액은 1970억원이었다. 반대로 가장 많이 사들인 종목은 SK하이닉스로, 순매수액은 1089억원이었다.
‘연기금 등’에는 국민연금뿐 아니라 사학연금과 공무원연금, 각종 공제회의 거래가 함께 잡힌다. 이 수치만으로는 국민연금의 실제 매매 규모와 거래 종목을 가려낼 수 없다. 공개된 연기금 수급만 놓고 보면 리밸런싱 재개 직후 시장이 우려한 수십조원대 매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첫 사흘간의 흐름만으로 향후 매도 규모를 예단하기도 이르다.
분명한 것은 74조4000억원이 당장 시장에 쏟아질 확정 물량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주가만 보고 기계적으로 주식을 사고팔지 않는다.
전체 자산의 배분 비중과 수익률, 시장에 미칠 충격을 종합적으로 따져 매매 시기와 규모를 조절한다. 국민연금은 증시를 떠받치는 구원투수가 아닌 국민의 노후자금을 장기간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투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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