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동물의 이름이 땅이름에 남겨진 것으로 ‘여우’만 한 것이 없다. 호천(弧川, 여우내)이 있고 호교(弧橋, 여호다리)가 있으며 호도(弧島, 여섬), 호전곡(弧田谷, 여시밧골/여의밧골/여수밧골), 호막(弧幕, 여슈막), 호정(弧井, 여우물), 호제(弧堤, 예수못), 호곡(弧谷, 여우골/여위골/여히골/야시골/여시골/여호골), 호동(弧洞, 여시골/여슈골/여수울/여의골/여이골), 호혈(弧穴, 여우구녕), 호암(弧巖, 여우바위/여슈바위/야슈방위/호바우) 등 여우를 앞에 달고 있는 지명은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여우라는 동물 이름은 산과 산골짜기를 돌아가는 산길의 이름에 가장 많다. 전국에 호치(弧峙, 여우고개), 호현(狐峴, 여우고개), 호항(弧項, 여우목), 호령(弧嶺, 여우고개)이 있거니와 그중 호현의 수가 가장 많다. 호령이나 호치, 호현이 모두 우리말로는 여우고개이지만 그 가운데 ‘호현’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고개를 나타내는 한자어 ‘령(嶺)’과 ‘치(峙)’, ‘현(峴)’이 대개 높이로 구별이 되는 것이라 ‘령>치>현’의 서열을 가지고 있는데 여우고개는 높은 고개보다는 낮게 옆으로 돌아가는 샛길에 부합하기 때문이다(남태령의 옛길 이름도 여우고개였다).
그런데 왜 유독 땅이름에 ‘여우’라는 짐승의 이름이 이렇게 많은 걸까. 쉽게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여우가 워낙 흔해서 혹은 그만큼 언중들에게 인상적이어서 땅이름에 여우를 많이 쓴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중세국어의 ‘엿다’라는 단어에 있다. 오늘날 ‘엿보다, 엿듣다’에 그 흔적을 남겨놓은 ‘엿다’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옆에서 몰래 지켜보다”, “잘 보이지 않는 대상을 좁은 틈 따위로 바라보다”를 뜻하는 말인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몰래 보는 동작이나 행동과 관련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말에서 “비나 눈이 오는 날 잠깐 났다가 숨어 버리는 볕”을 ‘여우볕’이라 하고 “볕이 나 있는 날 잠깐 내리다가 그치는 비”를 ‘여우비’, “볕이 나 있는 날 잠깐 내리다가 그치는 눈”을 ‘여우눈’이라 했던 것이다. 여우비는 다른 말로 ‘여호비’라고도 했을 터, 어원의식이 멀어지면서 이런 날을 ‘여우가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했다가 ‘호랑이가 시집가는 날’이라고 했던 것인데 모두 구름의 틈 사이로 ‘엿어’ 보이는 햇빛을 가리키던 말인 것이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둔다면 동네마다 있는 야트막한 산과 산 사이에 난 샛길 혹은 낮은 고갯길을 ‘여우길’ 혹은 ‘여우고개’라고 해왔던 정황을 알 수가 있다.
김양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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