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사이언스프리즘] 세서는 왜 딸을 죽였나

관련이슈 사이언스 프리즘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인쇄 메일 url 공유 - +

반복되는 자녀 살해 후 자살
자신이 감당 못할 처지라면
사회에라도 맡기는 선택 필요
그것이 부모의 마지막 책임

경기도 의정부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 17일 40대 부부와 미성년 자녀 두 명(11살, 8살)이 죽은 채 발견됐다. 이 사건을 접하고 필자는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 소설 ‘빌러비드’(1987년)를 떠올렸다. 토니 모리슨은 노벨문학상 수상(1993년) 작가다. 작품에서 도망 노예 세서는 자신의 집으로 노예사냥꾼과 전 노예주가 들이닥치자 아이들 셋을 급히 창고로 데려간다. 그리고 가장 나이 어린 여자아이의 생명을 빼앗는다. 이름도 없던 여자아이, 나중에 그 아이의 무덤 앞에는 ‘빌러비드’라고 새긴 묘비가 선다.

우리는 세서의 행동에 기겁한다. 아이가 아무리 비참한 삶을 살더라도, 그 삶을 끝낼 권리를 부모가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준석 과학저널리스트
최준석 과학저널리스트

‘빌러비드’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이 있다. 작가 토니 모리슨은 랜덤하우스 출판사에서 1974년 ‘더 블랙 북’이라는 책을 기획하면서, 1856년 마거릿 가너의 자녀 살해사건을 알게 된다. 마거릿 가너는 노예제도가 시행되던 켄터키주에 살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얼어붙은 오하이오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탈출했다. 노예사냥꾼에게 집이 포위되자 두 살배기 딸을 살해한다. 이후 교도소로 찾아간 목사가 물었다. 당시 흥분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아닌가? 마거릿 가너는 자신은 냉정했다고 답했다. 아이들이 노예로 되돌아가 서서히 고통받느니 단번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무겁다. 마거릿 가너는 자신이 딸을 미워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딸을 사랑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말했다. 작가 토니 모리슨이 작품 구상을 한 것도 이 뒤집힌 사랑이었다고 나는 본다.

‘빌러비드’를 읽으면 세서만 판단을 잘못한 사람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판단력을 갖고 있는 걸로 보인다. 그런데 남의 사건을 볼 때는 모두 잘못이라고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 왜 자기 일이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나? 170년 전 세서의 길을 왜 따라가는가? 의정부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접한 우리 대부분도 비슷하다. 어떻게 자식을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며 혀를 차면서, 나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다른 사람인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 미국 정신의학자 필립 레스닉(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 의대) 연구가 있다. 1751년부터 1967년까지 정신의학 문헌에 보고된 자녀 살해 131건을 찾아 분석했고, 1969년 그 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했다. 자녀 살해 유형을 동기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눴다. 학대·배우자에 대한 복수·망상 등 다양한 동기가 있었으나, 가장 많았던 건 뜻밖에도 그가 ‘이타적 자녀 살해’라고 부른 유형이었다. 49%였다. ‘이타적’이라는 용어는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부모가 자신의 행동을 아이를 위한 것, 이타적인 것이었다고 믿었다는 거다.

자살 연구자들은 극심한 절망 속에서 사람의 사고 폭이 좁아지는 현상을 ‘인지적 협착’이라고 부른다. 1964년 미국 임상심리학자 에드윈 슈나이드먼(UCLA)이 자살심리의 핵심 개념으로 체계화했다. 그는 현대 자살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슈나이드먼에 따르면, 평상시 우리 눈에는 여러 길이 보인다. 어려움이 있을 경우에 친척에게 아이를 맡길 수 있고, 복지기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빚은 조정할 수 있고, 부모가 없어도 아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살 유혹에 빠진 사람에게는 이런 길이 하나씩 사라진다. 생각의 폭이 좁아진다. 협착이 일어난다. 고통 속에서 계속 살아야 하나, 아니면 죽을까. 선택지는 둘뿐인 것처럼 보인다. 이후 위험한 도약이 일어난다.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내 아이도 더 이상 살 수 없다”로 바뀐다.

‘빌러비드’의 주인공 세서, 그리고 한국 의정부에서 ‘세서의 선택’을 따른 사람도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잘못된 선택이 계속되는 건, 절망이 깊어질 때 그 판단마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우리가 외면하는 탓이다. 부모의 삶이 무너졌다고 아이의 삶까지 무너진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자신을 실패했다고 판단해도 아이에게는 아직 판단하지 않은 삶이 남아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과 사회에 아이를 넘겨서라도 살게 하는 것이 부모의 마지막 책임이다. 그래서 ‘이타적 자녀 살해’에 대해 우리는 계속 얘기해야 한다.

 

최준석 과학저널리스트


오피니언

포토

선미, 핑크 메이크업에 금발까지
  • 선미, 핑크 메이크업에 금발까지
  • 강예원, 20대 같은 동안 미모
  • 아이들 미연, 여신 미모에 섹시미까지 장착…글래머 몸매
  • 문가영, 휴대폰 속 얼굴 옆에서도 굴욕 없는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