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 거장 박선기와 손잡고 아트 레이블 탄생
2020~2023 빈티지, 수묵 드로잉으로 시간 흐름 담아
와인과 예술의 만남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포도밭에서 태어나 오랜 시간 숙성을 거쳐 잔에 담기는 와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세계적인 와이너리들은 오래전부터 유명 작가와 손잡고 레이블에 예술을 입혔습니다. 보르도 5대 샤토 중 하나인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는 1945년부터 매년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의 작품으로 레이블을 장식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명가 니따르디(Nittardi) 역시 매년 세계적인 아티스트에게 레이블 작업을 의뢰해 와인과 미술이 만나는 순간을 만들어갑니다. 선정된 작가는 와이너리에서 2주 동안 머물며 새 빈티지 와인을 마시고 떠오르는 영감을 와인병 레이블과 포장지 등 작품 2개로 표현합니다. 여기에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해졌습니다. 한국인이 소유한 미국 나파밸리 와이너리 다나 에스테이트(Dana Estates)의 대표 와인 ‘바소(VASO)’ 레이블에 한국을 대표하는 설치미술의 거장 박선기 작가가 참여한 스페셜 에디션, ‘바소 박선기 컬렉션 아트 레이블’이 탄생했습니다.
◆설치미술의 거장
서울 장충동 호텔신라 로비로 들어서면 천장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설치작품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수만 개의 투명 아크릴 비즈를 가는 나일론 와이어에 일일이 매달아 완성한 거대한 은하수 모양의 조형물 작품 ‘An Aggregation 130121-c’입니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비즈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조명을 반사해 화려한 생동감을 주는 덕분에 호텔신라의 인증샷 명소로 자리잡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붉은색 비즈를 더하는 등 매년 조금씩 변주됩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바로 설치미술의 거장 박선기 작가로 그를 널리 알린 대표작입니다. 작가는 3차원 공간 속에 수많은 개체를 매달아 형상을 만드는 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이자 조각가입니다. 1966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조소과와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국립미술학원에서 수학했으며, 1994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세계 주요 도시에서 3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2008년 김종영 조각상도 수상했습니다.
작가의 핵심 연작은 숯을 활용한 설치 작업입니다. 수많은 숯 조각을 공중에 매달아 기둥이나 계단, 한옥의 윤곽 같은 건축적 구조를 만들어내는데, 인간 문화를 상징하는 ‘건축 구조물’과 자연 속 나무의 최종 형태인 ‘숯’을 대비시키는 것이 특징입니다. 관람객이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제멋대로 매달린 숯들이 하나의 완벽한 3차원 형상으로 보였다가 다시 무질서한 점들로 흩어지는 착시 효과를 자아냅니다. 부분만 보아서는 전체를 알 수 없고, 공간을 이동하며 감상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비움과 진동, 그리고 시간의 미학’이 박선기 예술 세계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작가의 대형 설치작품들은 호텔신라, 더현대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하이브(HYBE) 사옥, 인천국제공항, 삼성전자, 메르세데스-벤츠, 현대카드, 홍콩 타임스퀘어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등 국내외 유수 기업과 기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바소와 박선기의 달항아리
이처럼 주로 대형 작품을 선보이던 그가 이번에 선택한 작품의 공간은 한 뼘도 안 되는 와인 레이블입니다. 그는 바소 와인의 4개 빈티지(2020, 2021, 2022, 2023)를 수묵 드로잉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소 의외로 보이지만 그의 이전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작가와 바소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소(VASO)는 이탈리아어로 ‘항아리’ ‘화병(Vase)’을 뜻합니다. 다나 에스테이트는 한국의 조선 백자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아 대표 와인 이름을 바소로 정했고 초기 바소 와인의 레이블에 사진작가 구본창의 달항아리 사진을 사용합니다. 달항아리가 지닌 순수함과 조화를 브랜드의 상징으로 삼은 겁니다. 지금은 연꽃 레이블로 바뀌었지만, 브랜드 스토리에서는 여전히 달항아리가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2022년 청담 분더샵에서 열린 기획전 <ART-IST : ways of seeing>에서 선보인 대표 연작 중 하나인 ‘조합체(An Aggregation) 20220719’가 달항아리를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작가는 검은 숯 조각들을 아주 정밀하게 계산된 위치에 나일론 줄로 하나하나 매달아, 멀리서 보면 공중에 먹으로 그린 듯한 달항아리가 둥실 떠 있는 듯한 착시를 줍니다. 3차원에 그린 수묵화인 셈입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완벽한 입체의 달항아리 형태를 띠지만, 옆으로 이동하거나 가까이 다가가면 항아리의 형태가 흩어지며 추상적인 수많은 숯 조각으로 해체됩니다.
다나 와인을 수입하는 에노테카코리아는 설립 15주년을 기념, 박선기 작가와 협업해 <바소 박선기 컬렉션 아트 레이블>을 선보였는데 작가는 이번에는 숯 조각으로 만들었던 달항아리를 수묵 드로잉으로 표현합니다.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바소 와인의 2020, 2021, 2022, 2023 네 개 빈티지를 직접 테이스팅한 뒤 숯 조각이 모여 달항아리를 이루듯, 수묵의 결을 사용한 드로잉으로 4개 빈티지의 맛과 풍미를 달항아리의 변화로 그려냈습니다. 와인의 향과 구조감이 단단한 빈티지는 꽉 찬 달항아리로, 부드럽고 유연한 풍미의 빈티지는 선이 번지거나 흩어지는 형태의 달항아리로 표현합니다. 드로잉에 차이를 둬 와인 본연의 에너지를 시각화한 겁니다.
와인은 포도가 자란 해의 ‘기후(자연)’와 오크통 속에서 숙성되는 ‘시간’이 빚어내는 예술입니다. 작가의 설치 작품 역시 나무가 불을 견디며 생긴 ‘숯(자연)’과 이를 정밀하게 배열하는 작가의 ‘시간’이 결합된 결과물입니다. 이처럼 두 영역 모두 ‘자연의 언어로 기록된 시간의 형태’라는 핵심 철학을 공유하고 있으며, 작가는 와인 안의 침묵과 울림을 달항아리 그림을 통해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풀어냈습니다. 작가는 “와인은 자연이 시간과 함께 빚어낸 형태다. 나는 그 형태가 지닌 침묵과 울림을 그림으로 옮기고자 했다”고 설명합니다.
◆네 개의 빈티지, 네 개의 시간
바소는 매년 블렌딩 비율이 달라지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이 주품종(90~95%)이며 쁘띠 베르도, 메를로, 말벡, 카베르네 프랑 등을 소량 섞는 전형적인 보르도 블렌딩 스타일 와인입니다.
▶바소 2020
작가는 바소 2020을 통해 따뜻한 빈티지가 지닌 응축된 에너지와 균형의 미학에 주목했습니다. 풍부한 과실의 밀도와 생동감 있는 산미, 정제된 타닌의 구조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조화와 긴장을 동시에 느끼게 했고, 그는 이를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한 형태로 시각화했습니다.
<작가 노트>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 2020은 따뜻한 계절이 남긴 밀도와 시간의 흔적을 조용히 품고 있었다. 첫 모금에서 느껴진 풍부한 과실의 에너지와 그 안에 깃든 긴장감은 단단하지만 과하지 않은 균형으로 오래 머물렀다. 나는 이 와인을 '채워진 비어 있음'으로 느꼈다. 이 작품은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 2020이 보여준 생동과 균형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조율이 만들어낸 한 순간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바소 2021
최고의 집중도와 균형으로 완성된 바소 2021을 위해 작가는 바소의 가장 상징적 이미지인 달항아리를 선택했습니다. 건조한 기후와 낮은 수확량이 만들어낸 이 와인은 힘을 과시하기보다 스스로 완결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작가는 이를 가장 이상적인 비례와 중심을 가진 형태로 시각화했습니다.
<작가 노트>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 2021은 완성된 구조와 화려한 아로마로 다가왔고 나는 이 훌륭한 빈티지에서 와인이 도달한 하나의 정점을 분명히 느꼈다. 더 이상 덧붙일 필요가 없는 상태를 달항아리의 형상에 담고자 했고, 최고의 집중도와 정교한 균형으로 완성된 2021 빈티지에 대한 나의 응답이자,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이 지향해 온 미학이 가장 명확하게 구현된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바소 2022
바소 2022는 정점 이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비교적 이른 개화와 안정적인 생육, 긴 성숙의 시간은 와인에 풍부한 과실의 밀도와 유연한 구조를 동시에 부여했습니다. 잘 익은 블랙 체리와 카시스의 농밀함 위에 더해진 부드러운 타닌과 생동감 있는 산미를 시각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작가 노트>
“바소 2022의 풍부한 과실의 밀도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나는 긴장보다 유연함, 응집보다 확장의 감각을 느꼈다. 잘 익은 블랙 체리와 카시스의 깊이, 둥글어진 타닌 그리고 생동감 있는 산미가 만들어내는 호흡을 시각적으로 옮긴 것이다. 이 드로잉은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이 정점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시간과 함께 더욱 풍부해지는 과정을 기록한다. 나는 이 와인을 마시며 완성 이후의 진화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그리고자 했다.”
▶바소 2023
늦은 비와 긴 생장기, 그리고 충분한 기다림 후의 수확은 와인에 풍부한 과실의 밀도, 정교한 구조와 함께 뛰어난 숙성잠재력을 남겼습니다. 달항아리를 연상시키는 이 형태는 비어 있음과 충만함이 공존하는 상태, 풍요를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의 중심에 안착한 빈티지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현재에 단단히 뿌리내리면서도 자연스럽게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정체성을 담아냅니다.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이 지나온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연속된 시각적 서사로 마무리하는 장면입니다.
<작가 노트>
“바소 2023은 나에게 '모든 시간이 하나로 이어지는 감각'을 전했다. 나는 이 빈티지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고요한 안정감을 느꼈다. 위로 열려 있는 실루엣과 표면을 따라 흐르는 흔적들은 잘 익은 과실의 깊이, 둥글게 정돈된 타닌 그리고 긴 여운 속에 남는 신선한 에너지를 담아낸 것이다. 이 작품은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이 지난 네 해 동안 축적해온 시간에 대한 기록이자, 하나의 정체성이 완성된 이후에도 계속 열려 있는 놀라운 숙성잠재력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금주령을 딛고 일어선 다나 역사
나파밸리의 심장 러더포드(Rutherford)에 있는 다나 에스테이트는 대규모 생산이나 화려한 마케팅 대신, 극도의 정밀함과 싱글 빈야드 테루아 중심 양조 철학으로 명성을 쌓아 올린 와이너리입니다. 다나의 역사는 와이너리 설립연도보다 훨씬 이전인 18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는 나파밸리와 소노마 등 캘리포니아의 대부분이 멕시코령으로 대부분 미개발 상태였습니다. 1846년 에드워드 베일(Edward Bale) 박사는 나중에 소노마 시를 창건한 인물로 토지 분배를 담당하던 마리아노 과달루페 발레호(Mariano Guadalupe Vallejo) 장군의 조카 마리아 이그나시아 발렌시아 데 발레호(María Ignacia Valencia de Vallejo)와 결혼해 멕시코 영주권을 획득하고 약 1만8000에이커(약 7200ha)의 토지를 소유합니다. 둘은 루더포드 화이트홀 레인에 있는 29번 고속도로에서 약 1마일 떨어진 곳에 흙벽돌로 어도비 주택을 지으며 정착했는데, 이 주택이 바로 현재 다나 에스테이트가 있는 자리입니다.
베일 박사의 토지는 정착한 여러 유럽 이주민들의 손을 거치다 1883년 독일 출신 이민자로 샌프란시스코의 식료품 상인이던 헨리 W. 헬름스(Henry W. Helms)가 현재 헬름스 빈야드 땅을 매입해 4ha에 포도를 심으면서 본격적인 와인 생산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는 잘 디자인된 석조 와이너리를 건설하고 1883~1906년 와인을 생산해 상당한 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금주령(1919~1933년)으로 와이너리가 그만 폐허로 변합니다.
이런 와이너리와 헬름스 부지를 1976년 석유 엔지니어이자 지질학자 출신인 존 리빙스턴(John Livingston)과 다이앤 리빙스턴(Diane Livingston) 부부가 매입하면서 큰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포도를 팔다가 1984년 ‘리빙스턴 빈야즈(Livingston Vineyards)’를 거쳐 ‘리빙스턴-모펫(Livingston-Moffet)’ 이름으로 와인을 생산합니다. 리빙스턴-모펫 시절 랜디 던(Randy Dunn), 존 콩스가드(John Kongsgaard), 마르코 디 줄리오(Marco Di Giulio), 후안 메르카도(Juan Mercado) 등 저명한 와인메이커들이 와이너리를 거쳐 갑니다. 여기에 러더포드 AVA가 1993년 승인되면서 러더포드는 나파밸리의 심장으로 떠오릅니다.
◆비극적 화재에서 걷어 올린 희망
하지만 리빙스턴 부부는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사건을 겪게 됩니다. 창고 화재로 오래 숙성하던 라이브러리 와인과 출시용 와인 전량을 잃어 버렸고 결국 와이너리 매각을 결정합니다. 이를 2005년 매입한 인물이 현재 오너인 이희상 전 동아원 그룹 회장입니다. 한국에서 와인 수입사 나라셀라를 운영할 정도로 와인에 애착이 컸던 그는 직접 경영할 와이너리를 찾다 리빙스턴-모펫과 인연이 닿아 와이너리를 전격 인수합니다. 그러나 와이너리는 화재로 벽 일부분 남아있을 정도로 크게 훼손돼 철거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유산을 보존하기 원했던 이 회장은 2024년 작고한 저명한 건축가 하워드 바켄(Howard Backen)이 이끄는 바켄 & 길럼 아키텍츠(Backen & Gillam Architects)를 통해 일부 벽체를 보존한 와이너리 복원에 성공합니다. 현재 건물은 방문객들의 테이스팅룸 등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다나(Dana)는 ‘관대한 정신’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입니다. 타협 없는 품질 기준을 지키면서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자연이 지닌 관대함을 존중하고 구현한다는 의미를 와이너리 이름에 담았습니다. 다나 레이블에 그려진 12송이 연꽃은 포도나무의 생애 주기를 구성하는 12개월과 12지 동물을 의미합니다. 다나 와인은 4개 싱글 빈야드를 중심으로 다나, 바소(VASO), 온다(ONDA) 와인을 생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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