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교통로 위기와 한국의 대응 전략 논의
공공재 ‘소비자’에서 ‘공급자’ 역할 고민해야
미국과 이란의 분쟁으로 세계 주요 원유 운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가 커지면서 ‘자유로운 해상 무역’이 힘들어진 가운데, 국가 생존 차원에서 해양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종현학술원과 대한민국 해군은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한국고등교육재단 컨퍼런스홀에서 ‘바다가 흔들리면 국가가 흔들린다’를 주제로 공동 주최 포럼을 열고, 국제 해양질서 변화가 대한민국 경제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이날 포럼에는 김경률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해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 유재준 해군 대령, 권보람 한국국방연구원(KIDA) 연구위원,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 김동규 PADO 편집장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공급망과 에너지 안보, 해군력, 국제법, 해운·조선산업을 아우르는 대한민국의 경제안보·해양안보 전략을 다각도로 논의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해양안보를 더 이상 군사 영역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경제안보 인프라로 인식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해상교통로의 안정은 에너지와 공급망, 제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국가 생존의 문제인 만큼, 군사력뿐 아니라 외교·산업·법·제도·조선·해운을 아우르는 범정부 차원의 통합 전략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경률 해군참모총장은 개회사에서 “대한민국은 바다를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해양국가인 만큼 바닷길이 흔들리면 국가 경제와 안보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며 최근 국제 해양통상 질서가 불안정해지고 공급망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해상교통로의 안전 확보가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다고 진단했다.
이어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특징은 사실상 ‘해양경제’”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 수입 물동량의 99.9%, 수출 물동량의 97.9%가 해상을 통해 이동하고, 에너지 수입의 약 96% 역시 바닷길에 의존한다. 원유와 LNG 등 핵심 에너지의 상당 부분도 중동 해상교통로를 통해 국내로 들어온다.
정 선임연구위원은 “반도체와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은 항공으로 수출할 수 있지만,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와 원자재, 소재·부품·장비는 대부분 해상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다”며 “해상교통로 차질은 단순한 물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공급과 제조업 생산, 수출 경쟁력을 동시에 흔드는 국가 경제안보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어 “해상교통로는 한국 제조업의 생명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해양질서가 국제분업과 글로벌 가치사슬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기반’이라고 규정했다. 항행의 자유와 주요 해상교통로(SLOC)의 안정성은 국제무역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거래비용과 위험 프리미엄을 낮춰 기업의 생산과 투자, 공급망 운영을 뒷받침하는 핵심 조건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해양안보는 더 이상 국방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경제안보 변수”라며 “이 같은 제도적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 해군의 중요한 국가적 역할”이라고 말했다.
정 선임연구위원은 중동 사태 이후 공급망 위험이 실제 데이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국가 공급망 조기경보시스템(EWS) 분석 결과, 최고위험(85점 이상) 단계에 진입한 품목 수는 지난해 말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반도체와 전자부품, 화학소재 등 첨단 제조업 관련 품목의 위험도가 빠르게 높아졌고, 원유·프로판·부탄·나프타 등 주요 에너지·원자재는 가격 상승과 수입 물량 감소가 동시에 나타났다.
그는 호르무즈 해협 위기를 사례로 들며 “에너지 가격 충격이 석유화학과 반도체 소재, 배터리 등 제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과거에는 비용 최소화가 공급망 전략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위험을 관리하고 회복력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며 “정부와 기업이 공급망 위험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구조적 취약성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대응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AI 시대, 바다를 지키는 방식도 달라져야
유재준 해군 대령은 미국 중심 국제질서가 변화하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새로운 국가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더 이상 모든 해양질서를 단독으로 유지하기보다 동맹국과 역할을 분담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며, 한국도 전략적 자율성을 갖춘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진단했다.
유 대령은 “해양안보는 더 이상 군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과 에너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경제안보이자 국가 생존의 문제”라며 “대한민국은 동맹과 전략적 자율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첨단기술과 조선·방산 역량을 강화해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하이브리드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 전장의 양상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미국의 대이란 군사작전을 사례로 들며 “현대전은 누가 더 빠르게 관찰(Observe)하고, 상황을 분석(Orient)하며, 결심(Decide)하고, 행동(Action)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은 AI 기반 정보분석체계를 활용해 위성과 무인기, 감시정찰(ISR) 자산에서 수집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통합·분석하고, 표적 식별부터 타격, 전과 평가까지 의사결정 전 과정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유 대령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해군도 AI 기반 지휘통제체계와 한국형 해양영역인식(MDA) 체계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고 제언했다. 함정과 잠수함, 해상초계기, 위성, 레이더 등 다양한 감시자산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해양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AI를 활용해 위협을 조기에 탐지·분석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래 해군의 경쟁력은 함정을 보유하는 것과 더불어 정보를 가장 빠르게 연결하고, 가장 신속하게 결심하는 능력이 해군의 새로운 전투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AI와 데이터 기반의 해양작전 역량 확보가 앞으로 대한민국 해양안보를 좌우할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도 더는 혼자 바다를 지키지 않는다…한국도 역할 바꿔야”
권보람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국제질서의 변화를 미국의 전략 변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는 “미국은 더 이상 모든 해양 공공재를 혼자 제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최근 통행료 부과 움직임은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니라 동맹국들과 해양질서 유지 부담을 나누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권 연구위원은 “이번 이란 사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이 무엇을 했느냐보다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라며 대규모 지상군 투입을 자제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과거처럼 국제질서를 단독으로 유지하기보다 동맹과 지역국의 역할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국이 모든 초크포인트를 무조건적으로 보증하는 시대는 사실상 끝나고 있다”며 “앞으로는 미국이 전체 질서를 설계하고 동맹국과 지역국이 역할을 분담하는 ‘하이브리드 질서’가 현실적인 모델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어 “한국 역시 해양질서의 소비자에 머무르기보다 공공재 공급에 기여하는 국가로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행의 자유만으로는 부족”…국가통제선대와 해군이 해양안보의 핵심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해상교통로를 둘러싼 위기가 단순한 안보 문제가 아니라 국제법과 해운산업, 국가 수송체계를 함께 점검해야 할 과제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국제항행해협에서는 선박의 통과통항권이 보장되는 만큼 단순히 통항 자체를 이유로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국제해양법 질서와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다만 항행안전 서비스 등 실제 서비스를 제공한 경우에는 일정한 비용을 받을 여지가 있다며, 항행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과 외교적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대만해협 등 전략 해역의 위기가 현실화되면 운임과 보험료 급등은 물론 전략물자 수송에도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며, 기존 국가필수선박 제도를 넘어 정부가 유사시 직접 활용할 수 있는 국적 중심의 ‘국가통제선대(Nationally Controlled Fleet)’를 확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미국의 해상안보프로그램(MSP)처럼 평시에는 상업 운항을 하되 비상시에는 전략물자 수송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어 김 교수는 “전쟁위험이 현실화된 해역에서는 군함의 호위를 받는 상선이 더 낮은 운송비와 보험료를 바탕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국가필수선대와 해군 호위체계를 연계한 국가 해상수송안보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는 앞으로 북극항로 개통이 한국의 해양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는 중동에 의존해 석유를 수입했지만, 앞으로는 북극항로를 통해 에너지 도입선을 다변화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이 항로를 이용하는 에너지 수송선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앞으로 대한민국 해군의 핵심 임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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