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상상해 본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2006년, 나는 대한민국 정신과 의사로서는 처음으로 이라크 전쟁 지역에 파병됐다.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에서 미군을 비롯한 다국적군과 함께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사방이 모래뿐이었다. 낮이면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드물었지만 폭발음이 들려오기도 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머리맡에 방탄모와 방탄조끼를 놓아두었다.
그곳에서 나보다 열 살쯤 많은 미군 정신과 군의관을 만났다. 어느 날 그는 아내의 사진을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일본인 헤어디자이너라고 했다. 일본인과 살면서도 그는 스시를 싫어했다. 날생선을 어떻게 먹느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휴스턴에 산다는 그는 한국이 추워서 싫다고 했다. 한국의 겨울을 무슨 시베리아쯤 되는 곳처럼 말했다.
그가 내게 보여준 또 다른 사진 한 장이 있다. 당시에는 꽤 고가였던 소니 바이오 노트북의 화면 한가운데 군용 칼이 꽂혀 있었다.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던 병사가 자기 노트북을 칼로 찌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다. “사람을 찌르지 않은 게 다행이지.” 화면을 관통한 칼날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그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규정을 중요하게 여겼고,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그를 보좌하던 의무병이 컴퓨터 키보드 옆에 음료수가 든 컵을 놓아둔 채 일하는 것을 보고 즉시 질책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컴퓨터 옆에는 음료수나 물을 두지 마라. 그렇게 하라고 배우지 않았느냐.” 내가 보기에는 별일 아닌 일에도 그는 엄격했다. 한국 군의관들이 군병원 안에서 군화 대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것도 못마땅해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친하게 지내던 내게 “너는 그러지 마라”고 핀잔 섞인 당부를 했다.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고, 사람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그는 정해진 시간을 지키고, 군화를 신고, 컴퓨터 옆의 물 한 잔까지 치웠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만들 수는 없어도, 자신이 지켜야 할 작은 질서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세계는 불안정하다. 그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불안하다. 앞으로 괜찮아질 거라고 누구도 장담해 줄 수 없다. 주변이 온통 흔들리더라도 누군가는 자기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된다.
어느새 그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지금은 전쟁터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일상이 마치 전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제까지 당연하던 것이 오늘은 통하지 않고, 겨우 익숙해진 삶의 규칙은 금세 낡아버린다. 치열하게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진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니나 시몬이 부른 ‘You’ve Got to Learn’을 들었다. 노래는 슬픔이 흔적처럼 남아 있더라도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했다.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부서졌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내일을 상상해 본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부서진 마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 노래의 후렴구가 맴돌고 있다. “그래도, 너는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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