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환경·건축, ‘빛’ 주제로 연결
시선 잡는 이반 나바로 ‘에코’ ‘무제’
佛 현대미술가 파레노 ‘마퀴’ 공개
김아영 연작 ‘딜리버리 댄서’도 전시
김성희 관장 “새 40년 상상 계기되길”
바닥에 펼쳐진 작품을 보는 순간, 빛이 만들어내는 환영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순간의 느낌이라고 할까. 끝없이 반복되고 이어지는 공간감 속에서 공포와 불안, 경이와 아름다움의 모순적 감정이 움터오기 시작했다.
사용된 단어 역시 묘했다. ‘메아리, 울림’을 의미하는 단어 ‘에코(echo)’를 연상시키게 하는 단어 ‘에코(ECCO)’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네온 이미지와 단어들에 의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역시 흔들리는 듯했다.
지난 9일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관의 새로운 원형전시실에서 만난 칠레 출신 작가 이반 나바로(Ivan Navarro)의 대표적 네온 설치작품인 2012년작 ‘에코(ECCO)’는 공간의 깊이와 반복성을 통해 어떤 모순적 감각들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 나바로는 언젠가 해외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저는 양면성을 가진 단어들을 좋아합니다. 하나는 매우 모호하고, 다른 하나는 매우 객관적이죠. 언어를 더 잘 이해하고 단어의 시적인 면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기도 하죠.”
함께 전시되는 나바로의 ‘무제(쌍둥이 빌딩)’는 두 개의 정사각형 모양의 낮은 유리상자 안에 끝없이 아래로 꺼지는 듯한 공간이 펼쳐지는 작품이다. 끝없이 추락하거나 솟아오르는 듯한 시각적 착시를 통해 9·11테러로 사라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의 부재와 기억을 상기한다.
1972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난 나바로는 이듬해 집권한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사람들을 집에 가두고 통제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밤 도시의 전기를 차단하는 것을 목격하며 자라야 했다. 학창 시절 끝자락, 그는 졸업논문 프로젝트로 전시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재료만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전시장의 트랙 조명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전구를 연결한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네온과 백열등, 형광등, LED 등 빛을 내는 재료를 주로 소재로 사용하고, 여기에 조각과 음악, 퍼포먼스 등도 결합한 작품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 개관 40주년을 맞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빛’을 매개로 자연과 건축,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개관 40주년 기념 프로젝트 ‘MMCA 과천 40주년: 빛의 상상들’이 지난 10일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과천관의 가장 큰 특징인 자연환경과 건축을 ‘빛’이란 공통된 주제로 연결, 관람객들이 미술관 로비와 브리지, 전시실, 야외 조각공원으로 이동하면서 시간과 공간, 작품이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빛의 풍경을 경험하도록 했다. 로비와 공용공간의 ‘광경’, 제2원형전시실의 ‘잔상’, 야외 조각공원의 ‘머무는 자리’ 세 개의 프로젝트로 구성됐다. 작품을 전시장 안에 배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술관 전체를 하나의 전시 공간으로 확장한 셈이다.
먼저 프로젝트의 출발점인 미술관 로비에선 과천관을 상징하는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 작품 ‘다다익선’ 앞에 프랑스 현대미술가 필립 파레노의 대표작 ‘마퀴’를 만나게 된다. 극장 입구 전광판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후 처음 공개됐다. 점멸하는 빛만 반복될 뿐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은 채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장치로 기능한다. 작가 파레노는 영화와 설치, 퍼포먼스, 사운드, 조명 등을 넘나들며 전시 자체를 하나의 살아 있는 시스템처럼 구성하는 작가로, 개별 작품보다 작품 사이 관계와 관람객 경험을 중시한다.
3층 브리지에서는 지난해 한국인으론 처음 LG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한 김아영의 대표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가 장소특정적 설치로 새롭게 선보인다. 작품은 김 작가의 대표 연작인 ‘딜리버리 댄서’의 주요 작품으로, 가상의 도시를 횡단하는 두 인물의 여정을 통해 속도와 시간, 과거와 미래,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복합적 시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알고리즘과 플랫폼 경제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시간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게 한다는 평가다. 기존 3채널 영상 설치를 과천관 브리지 공간에 맞춰 40개의 LED 패널을 이용해 재구성했다.
새롭게 조성한 원형 전시실에선 미국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과 칠레 출신 작가 이반 나바로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빛을 탐구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빛의 거장’으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은 1960년대부터 빛 자체를 하나의 재료로 삼아 공간과 인간의 지각을 탐구해 온 현대 미술가이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상상들, 넓은 직사각형의 곡면 유리’는 2000년대 이후 LED 조명과 반투명 직물을 활용해 공간 전체를 빛으로 채우는 ‘글라스워크’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약 2시간30분 동안 빛의 색이 서서히 변화하면서 공간을 다양한 빛으로 물들이면서 관람객들에게 명상과 사색으로 이끌 것이다.
과천관 야외 조각공원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앉거나 기대며 감상할 수 있는 신작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신진작가인 김하늘(28), 방효빈(29)을 비롯해 임정주(41), 하지훈(54), 황형신(45) 등 다섯 작가가 기존 조각공원 내 작품들과 어우러지고, 관람객이 직접 만질 수 있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김하늘의 ‘스티로폼 소파(어상자)’와 임정주의 ‘논엘로퀀트’ 등 관람객은 작품 위에 앉거나 기대며 조각과 자연을 몸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현주 학예연구사는 “40년간 축적된 시간과 장소성 위에 오늘의 감각과 경험을 덧입히는 프로젝트”라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관객과 새롭게 조우하는 조각공원을 재발견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전시와 함께 밤의 미술관 탐사와 특별강연, 조각공원 관련 영화 상영, 참여형 아카이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함께 마련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과천관이 지난 40년 동안 축적해 온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미래 40년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서울의 도시적 활력과 과천의 자연환경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미술관으로, 1986년 건축가 김태수의 설계로 개관했다. 한국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수집, 연구하며 그 역사를 함께 써 온 공간인 동시에 오늘날에도 소장품 전시와 연구, 한국미술사 연구의 중심 거점으로서 새로운 담론과 예술적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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