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 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9>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관련이슈 참사랑 , 한민족 대서사시

입력 :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인쇄 메일 url 공유 - +

이성의 칼날로 사유의 성당을 짓고, 지성의 정점에서 발견한 겸손

신앙은 믿음의 영역이고, 이성은 증명의 영역일까. 인간은 두 세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까. 중세 유럽은 오랫동안 이 물음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신앙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이성은 점점 더 세계를 설명하려는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다. 특히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상적 체계를 세운 인물로 유명하다.

 

아퀴나스의 영향력은 종교 창시자들에 버금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놓은 사상가라면, 아퀴나스는 그 위에 거대한 사유의 성당을 세운 건축가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통합함으로써 중세 대학교육과 근대 학문의 지적 토대를 정립했다. 오늘날 서양의 법철학과 윤리사상, 자연법 전통의 형성에도 그의 영향은 깊게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신학자를 넘어 세계사를 움직인 영성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면하기 1년 전인 1273년 나폴리 시민들에게 매일 신앙강좌를 열었는데, 그 강의 내용을 담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톨릭 교리서’ 표지. 출처: 가톨릭출판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면하기 1년 전인 1273년 나폴리 시민들에게 매일 신앙강좌를 열었는데, 그 강의 내용을 담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톨릭 교리서’ 표지. 출처: 가톨릭출판사

◆신앙과 이성의 위대한 화해를 선언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 초 이탈리아 남부 아퀴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고향인 아퀴노(Aquino)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퀴노 출신의 토마스’라는 뜻이다. 아퀴나스는 당시 유럽의 중심 학문 기관이었던 수도원과 대학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어 신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시대에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이슬람 학자들을 통해 다시 유럽에 소개되면서 큰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보았지만, 아퀴나스는 오히려 그 안에서 공존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이성과 신앙이 대립 쌍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동반자라고 확신했다.

 

아퀴나스에게 이성은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이고, 신앙은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이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이 한 문장은 그의 사상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신앙은 이성을 완성시키는 힘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동시에 이성을 넘어서는 궁극적 진리를 신앙으로 수용했다. 학문적 탐구와 종교적 신념이 한 인격 안에서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해 낸 것이 그의 첫 번째 영성적 성취다.

 

그는 학창 시절 매우 말이 적고 과묵했다고 전해진다. 동료 학생들은 그가 체격이 크고 성격이 조용해서 ‘멍청한 황소’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워낙 말이 없었고, 토론 자리에서도 쉽게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스승이자 지도교수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달리 보았다. “이 황소의 울음소리는 온 세상을 울릴 것이다.” 이 평가는 이후 아퀴나스가 서양 신학의 거대한 체계를 세운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세상은 종종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주목하지만, 역사는 때때로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아퀴나스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아퀴나스가 화려한 사제직 대신 청빈한 탁발 수도회(도미니코회)에 입회하려 하자, 백작 가문이었던 그의 가족들은 이를 수치로 여겨 그를 성에 2년간 감금했다. 심지어 형들은 그의 의지를 꺾으려 방에 매혹적인 여성을 들여보내 유혹하기도 했다. 이때 아퀴나스는 화로에서 타오르는 장작을 꺼내 들고 여성을 쫓아낸 뒤, 그 장작으로 방문에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로 유혹을 물리쳤다. 전승에 따르면 이때 천사들이 나타나 그의 허리에 ‘순결의 띠’를 묶어주었으며, 이후 그는 평생 육체적 유혹에서 벗어나 오직 학문과 기도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아퀴나스는 공부할 때 매우 집중력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식사나 주변 상황에 거의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사유에 몰입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수도원 식사 자리에서도 장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고, 주변 사람이 그를 흔들어 깨우자 잠시 현실로 돌아온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일화는 그가 얼마나 개념적 사유와 논리 구조에 깊이 몰입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전해진다.

 

◆‘멍청한 황소’의 침묵과 사유, 온 세상을 울린 지성의 사자가 되기까지

 

그는 차가운 논리의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가슴 뜨거운 시인이자 성가 작사가였다.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요청으로 성체성혈 대축일을 위한 찬미가 ‘입을 열어 찬미하세(Pange Lingua)’를 지었다. 이 찬미가의 마지막 두 연인 ‘지존하신 성체(Tantum Ergo)’는 오늘날까지 가톨릭 전례에서 가장 널리 불리는 성체성가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복잡한 논증을 펼치던 거대한 지성이 신 앞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운율로 사랑을 고백하는 예술가로 변모했던 셈이다.

 

평생 그는 신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했다.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논증을 세웠으며,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말년의 어느 날, 미사를 집전하던 중 깊은 신비 체험을 한 뒤 붓을 꺾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쓴 것은 모두 지푸라기 같다.” 그것은 학문의 실패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이성의 정점에 오른 사람이 마지막에 발견한 영적 겸손이었다. 그는 진리를 향해 평생 걸어갔지만, 진리는 자신이 설명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고백은 이성이 극한까지 확장된 이후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스스로 인정한 순간으로 해석된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지만, 동시에 그 이해가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것보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안다”고 고백했다. 그의 영성은 무조건적인 맹신이나 지식의 확장이 아니었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자각하는 겸손한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아퀴나스는 일상적 욕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수도원 생활에서도 매우 절제된 삶을 살았다. 그는 육체적 욕구보다 사유와 연구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묘사된다. 이 때문에 동료들은 그를 철학자라기보다 ‘사유하는 수도사’로 바라보았다. 아퀴나스의 삶은 이성과 신비, 학문과 영성이 한 인격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 저작인 ‘신학대전’은 기독교 신학 전체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대작이다. 그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 있는 구조로 이해했고, 신앙 역시 그 질서의 정점에 있다고 보았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신학교의 핵심 교재로 사용되며, 신앙을 이성적으로 탐구하려는 전통의 대표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아퀴나스는 교회 내부뿐 아니라 서양 철학 전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결합하면서 스콜라 철학의 정점을 세웠고,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 학자’이자 ‘천사적 박사’로 불린다. 특히 ‘천사적 박사’ 칭호는 가톨릭교회가 아퀴나스에게 헌정한 최고의 찬사로, 아퀴나스가 보여준 초인적인 사유 능력과 논리적 명징함, 방대한 기독교 진리를 하나의 완벽한 체계로 엮어낸 지적 성취가 마치 ‘인간의 몸을 빌려 쓴 천사의 지성’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 19세기 후반 교황 레오 13세는 아퀴나스의 사상을 가톨릭교회의 공식 철학이자 신학적 기반으로 다시 강조했고, 이후 ‘토마스주의’는 가톨릭 신학의 중요한 참고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신학대전’의 거대한 성취를 뒤로한 채 “지푸라기 같다” 고백

 

아퀴나스의 사상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개념은 자연법이다. 아퀴나스는 자연법과 신법, 인간법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선과 악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으며, 올바른 법과 윤리는 이러한 자연적 질서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서양의 법철학과 윤리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신앙과 이성은 충돌하는가, 아니면 함께 갈 수 있는가. 아퀴나스가 내린 답은 분명했다. 신앙과 이성은 서로 싸워야 할 적이 아니며, 두 길은 서로 다른 방향이 아니라 진리라는 하나의 정상을 향하는 길이었다. 그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계를 치열하게 이해하려 하지만, 동시에 늘 그 이성 너머의 궁극적 의미를 묻는다. 아퀴나스는 마침내 인간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섰으나, 역설적으로 지성의 한계를 고백하며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퀴나스의 위대함은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지성의 끝에서 보여준 ‘이성의 겸손’에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오피니언

포토

웬디, 놀라운 스키니 몸매
  • 웬디, 놀라운 스키니 몸매
  • 차정원, 직각 어깨 드러낸 '올블랙룩'
  • 모모, 인형 비주얼
  • 장원영, 침대 위에 여신이 내려왔네…빛나는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