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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에도 현역인 이유, 신구가 60년 동안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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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기자 sj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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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들이 빌딩을 세울 때, 그는 단 한 줄의 대사를 위해 일생을 갈아 넣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90세 노인은 강남의 거대한 빌딩 숲이 아닌, 낡은 연극 대본이 쌓인 작은 책상 앞에 있다. 1936년생, 대한민국 현역 최고령 배우 신구. 카메라와 무대를 떠나지 않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단순히 연기가 좋아서일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64년 동안 쉼 없이 자리를 지켜온 그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매일 새벽마다 대본을 펼쳐야만 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엘리트 동기들 사이에서 ‘딴따라’라는 길을 택했던 청년은 이제 90세의 거장이 되어 다시 한번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무대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그는 돋보기 너머로 글자 하나하나에 무게를 싣는다. 연극 ‘라스트 세션’ 스틸컷
무대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그는 돋보기 너머로 글자 하나하나에 무게를 싣는다. 연극 ‘라스트 세션’ 스틸컷

그의 일상은 지루하리만큼 정직하다. 심부전증으로 심장에 박동기를 달고 있는 지금도, 그는 매일 아침 7시 기상을 고수한다. 아침 1시간 낭독 연습은 그가 연기 인생에서 단 하루도 거르지 않은 의식이다. 불필요한 외출이나 사교 모임은 없다. 공연장 근처의 작은 숙소에서 대본을 씹어 삼키듯 읽고, 동선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한다. 심부전증 진단 이후 즐기던 술도 막걸리 한두 잔으로 줄였다. 90세라는 나이에 그가 보여주는 것은 무대와 관객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철저한 자기 통제다.

단 한 줄의 대사를 완성하기 위해 수만 번을 읊조린 세월의 기록들이 여백마다 빼곡하다. KBS2 ‘해피투게더3’에 노출된 대본을 재구성한 연출컷.
단 한 줄의 대사를 완성하기 위해 수만 번을 읊조린 세월의 기록들이 여백마다 빼곡하다. KBS2 ‘해피투게더3’에 노출된 대본을 재구성한 연출컷.

신구의 대본 분석은 일반적인 배우들의 것과 밀도가 다르다. 수십 년간 수만 장의 종이를 넘기며 쌓인 손때, 여백마다 빽빽하게 적힌 고민의 흔적들은 그가 배역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하는지를 증명한다. 경기고등학교 시절 상과대학을 목표로 했던 우등생의 집요함은 이제 대본을 연구하는 현장에서 빛을 발한다. 경기고 52회 동창들, 우리 사회의 기틀을 닦은 정·재계의 거물들과 신구의 삶은 궤를 달리한다. 그는 유퀴즈에 출연해 “동창 400명 중 딴따라는 나 하나”라고 무심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 속에는 그가 평생 짊어지고 온 고독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동기들이 거대한 빌딩을 세우고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때, 그는 평생 강남의 작은 숙소와 무대를 오가며 단 한 줄의 대사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사실 그의 연기 인생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초, 남산 드라마센터 뒷골목에서 배고픔과 싸우며 오로지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던 신인 시절은 그에게 뼈아픈 굴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차가운 무대 뒤의 기억은 그에게 연기를 단순한 예술이 아닌 현장의 노동으로 인식하게 만든 냉혹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배역의 이름 뒤에 숨겨진 삶의 궤적을 찾아내기 위해 매일 수십 번씩 문장을 읊조린다.

 

90세의 육체는 분명한 제약을 가진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옆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간도 잦아졌다. 하지만 그는 무대 위에서만큼은 그 모든 한계를 잊는다. 시력이 나빠져 글자 크기를 키운 대본을 돋보기 너머로 응시하며, 관객과의 거리를 계산한다. 화려한 호텔이나 안락한 사적 공간 대신 공연장 근처의 소박한 숙소를 고집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무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컨디션을 세밀하게 관리하기 위함이다. 이는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품위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육체의 쇠락조차 연기라는 거대한 업(業) 앞에선 오로지 정복해야 할 과정일 뿐이다. 뉴시스
육체의 쇠락조차 연기라는 거대한 업(業) 앞에선 오로지 정복해야 할 과정일 뿐이다. 뉴시스

그가 후배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담백하다. 그럴듯한 수식어보다는 무대 위에서 담담하게 제 역할을 해내는 모습으로 답한다. 이병헌과 같은 후배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연기 기술 때문이 아니라, 반세기 넘게 보여준 변함없는 태도 때문이다. 한국 연극과 방송사의 산증인이자 영원한 거장이었던 고(故) 이순재와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이제 홀로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 있다. 51년을 해로했던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에도 그는 일상의 규율을 바꾸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를 보며 안쓰러움을 느끼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을 무대라는 현장을 지키는 실천가로 정의할 뿐이다.

 

2002년 롯데리아 광고에서 던진 “니들이 게맛을 알어?”라는 한마디는 그에게 대중적 인기와 예능적 이미지를 동시에 안겼다. 하지만 그는 그 일시적인 인기에 매몰되지 않았다. 코믹 연기와 정극을 엄격히 구분해 수행하며, 예능인이 아닌 배우라는 본질을 지켰다.

연기가 멈추는 것은 삶이 멈추는 것과 같다. 노배우가 써 내려가는 가장 뜨거운 현역의 증명.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
연기가 멈추는 것은 삶이 멈추는 것과 같다. 노배우가 써 내려가는 가장 뜨거운 현역의 증명.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

많은 이들이 은퇴 후의 안락함을 찾을 때 신구는 스스로를 더 좁은 무대 위로 밀어 넣었다. 이는 일반적인 직업적 성취를 넘어, 인간이 삶의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품위를 지키는 법을 보여준다. 90세 신구가 증명하는 것은 연기력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꺾이지 않는 루틴이다. 인생의 가치는 세상의 평판이 아닌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찰나의 순간을 끝까지 붙드는 집념에서 온다. 오늘도 그는 대본을 펼친다. 무대를 떠나는 것은 곧 삶을 지탱하는 핵심과 같음을 알기에, 그는 연기라는 업을 수행하는 한 명의 생활인으로서 묵묵히 그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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