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서 시작된 ‘하늘의 경마’…중국 자본이 판을 키웠다
경주마와 닮은 시장…돈은 ‘현재 우승’보다 ‘미래 챔피언’에 베팅
“비둘기 한 마리의 가격이 무려 26억원이라고?”
웬만한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다. 고급 수입 스포츠카 여러 대를 살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거액이 쓰인 곳은 아파트도, 슈퍼카도 아니었다. 비둘기 한 마리의 거래였다.
2020년 벨기에의 한 경매장. 경주용 비둘기 ‘뉴 킴’(New Kim)이 경매에 오르자 입찰가는 순식간에 치솟았다. 10만 유로를 넘어 50만 유로, 100만 유로를 돌파했고, 마지막 순간 두 명의 거액 입찰자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160만 유로에 낙찰됐다. 당시 약 190만 달러, 현재 환율로는 약 26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기록은 2026년 현재까지도 경주용 비둘기 단일 거래 최고가로 남아 있다.
시장이 거래한 것은 비둘기 한 마리의 몸값이 아니었다. 그 개체가 앞으로 남길 가치였다. 지난달 전 세계 경마계를 놀라게 한 1050만 달러(약 155억원)짜리 경주마 거래 역시 같은 논리다. 겉으로는 전혀 다른 스포츠처럼 보이지만, 돈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말과 비둘기 시장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경주용 비둘기 레이싱의 본고장은 벨기에와 네덜란드다. 수백㎞ 떨어진 지점에서 비둘기를 동시에 날려 보낸 뒤 가장 먼저 자신의 비둘기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겨루는 경기다. 오늘날에는 전자 칩을 이용한 자동 계측 시스템이 보편화되면서 기록의 정확성과 공정성도 크게 높아졌다. 유럽에서는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전통 스포츠로, 지금도 국제 대회와 대규모 경주가 꾸준히 열린다.
벨기에 왕립경주비둘기협회(KBDB)에 따르면 등록 사육자는 약 1만8000명에 달하며, 매년 80만~90만 마리의 경주용 비둘기가 생산된다. 오랜 육종 노하우와 체계적인 혈통 관리가 축적되면서 벨기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주용 비둘기 육종국으로 자리 잡았다. 국제 대회에서 성적을 입증한 혈통일수록 세계 시장에서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하지만 이 종목에서 진짜 승부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부터 시작된다. 뛰어난 성적을 거둔 개체일수록 자손도 우수한 경기력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 번식 가치가 급등한다. 결국 시장은 한 마리의 성적이 아니라, 그 혈통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우승 개체를 배출할 수 있는지를 가격으로 환산한다.
실제로 세계 최고가 기록을 보유했던 또 다른 경주 비둘기 ‘아르만도’(Armando)는 2019년 약 125만 유로(약 20억원)에 거래됐다. 그리고 불과 1년 뒤 ‘뉴 킴’이 그 기록을 경신했다. 최고가 기록이 잇따라 경신된 것도 우승 혈통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그만큼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경마 산업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최고의 경주마는 현역 시절 벌어들인 상금보다 은퇴 이후 씨수말이나 번식 암말로 활동하면서 훨씬 큰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경우가 많다. 한 번의 우승보다 우승 혈통을 얼마나 오래 이어갈 수 있는지가 시장 가치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비둘기와 다르지 않다.
혈통을 둘러싼 거래 규모도 꾸준히 커지고 있다. 세계 최대 경주 비둘기 경매 플랫폼 가운데 하나인 PIPA(Pigeon Paradise)는 2020년 한 해에만 약 3500만 유로(약 520억원) 규모의 거래를 중개했다. 특히 ‘뉴 킴’이 출품된 경매에서는 단일 경매 매출이 약 955만 유로(약 142억원)에 달하며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줬다.
이처럼 시장 가격을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핵심 변수는 최근 유입된 ‘중국 자본’이다. 과거 유럽 사육가 중심이던 시장에 중국계 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희소한 챔피언 혈통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졌고, 최상위 개체의 가격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역대 최고가 기록을 세운 ‘뉴 킴’과 이전 최고가였던 ‘아르만도’ 모두 중국인 투자자에게 낙찰됐다. 학계에서도 최근 수년간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수요 확대가 벨기에 경주 비둘기 시장의 가격 상승을 이끈 핵심 요인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는 누구나 쉽게 사고팔 수 있는 일반적인 투자 상품과는 거리가 멀다. 거래 참여자가 제한적이고 유동성도 낮다. 그럼에도 스포츠 산업 안에서는 희소성이 어떻게 경제적 가치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혐오 밈에 물든 청소년](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7/01/128/20260701520086.jpg
)
![[세계포럼] 구마모토 기적, 호남 희망고문](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2/11/128/20260211519179.jpg
)
![[세계타워] ‘사법 신뢰’라는 이름의 함정](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7/01/128/20260701520062.jpg
)
![[김형배의공정과효율] 승복의 조건, 공정한 절차](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7/01/128/20260701519969.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