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철학 없는 韓축구 ‘정체성 실종’
정식 감독 12명 평균 재임 1년 8개월
日은 모리야스 8년째 지휘봉 대조적
‘J리그 100년 구상’ 명확한 목표 제시
세계 무대 수비·역습 등 효율성 중요
장기 로드맵 구상 후 사령탑 세워야
전문가 집단 내 선임 권한 회복 필요
한국 축구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는 감독의 색깔과 개인적 역량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는 점이다. 대한축구협회의 장기적인 안목 아래 확실한 비전이나 철학을 세우고 세계 축구 트렌드에 발맞춰 운영하는 게 아닌, 감독에게 전권을 준 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사령탑만 교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다.
이렇다 보니 감독이 바뀔 때마다 전술적 색깔이 달라지면서 한국 축구는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해낸 거스 히딩크 감독 이후 김호곤 임시 감독을 시작으로 이번 북중미 월드컵을 지휘한 홍명보 감독까지 임시 및 감독대행 포함 총 18명이 대표팀을 지휘했다. 임시 및 감독대행을 뺀 정식 감독 12명의 평균 재임 기간은 1년8개월에 불과하다. 4년 주기로 열리는 월드컵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간이다. 그렇다 보니 감독들은 대표팀에 자신의 전술적 색깔이나 방향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월드컵에 임하기 일쑤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영원한 ‘숙적’ 일본만 봐도 감독들에게 오랜 시간을 부여한다. 일본의 대표팀 감독 평균 재임 기간은 약 2년6개월이다. 현재 대표팀을 맡고 있는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2018년 부임해 8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다.
모리야스 감독의 ‘사무라이 블루’는 이번 북중미 월드컵 32강전에서 브라질에 1-2로 패하긴 했으나 한국보다 훨씬 난도가 높은, 네덜란드, 스웨덴, 튀니지와 묶인 조별리그 F조에서 1승2무를 거둬 조 2위로 통과했다. 4년 전 카타르에서도 조별리그에서 우승후보급인 스페인, 독일을 꺾는 쾌거를 달성하는 등 한국 축구가 뒷걸음질 치는 사이 일본은 세계 축구의 중심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일본 축구가 한국과는 비교 불가 수준의 강해진 비결은 일본축구협회의 장기적인 비전과 로드맵에 따른 일관된 운영 덕분이다. 한국보다 10년 이상 늦은 1993년에야 J리그를 출범시킨 일본은 즉시 ‘J리그 100년 구상’을 선포해 “2050년까지 월드컵을 단독 개최하고 우승하겠다”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전 연령별 대표팀이 축구 철학을 공유하는 가운데,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현 대표팀 사령탑인 모리야스 감독이 2020년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챔피언십에서 1무2패로 탈락했지만, 일본축구협회 기술위원회는 모리야스 감독이 대회 내내 보여준 축구가 A대표팀과의 전술 지향점이 일치한다며 경질 여론을 일축했다.
박지성이나 손흥민(LAFC), 이강인(파리 생제르맹) 등 하늘에서 뚝 떨어뜨린 몇몇 천재적 재능들에 의존하는 한국 축구에 비해 일본은 손흥민급의 슈퍼스타는 없지만, 전체적인 선수들의 기량이 고르게 발전해 있다.
일본의 유럽파 선수는 100명이 훌쩍 넘으며, 일본축구협회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유럽 사무소를 설치해 유럽파 선수들에게 시설과 언어, 문화적 적응 등을 지원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감독을 데려와 어떤 축구를 할지 결정하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대한축구협회의 장기적인 로드맵 아래 어떤 축구가 한국에 가장 잘 맞는지를 먼저 정하고, 절차와 원칙에 따라 이에 맞는 감독을 데려와야 한다.
한국 축구는 아시아 무대와 변방국을 상대론 점유율을 높게 가져갈 수 있는 축구가 가능하지만, 세계무대에선 수비 위주로 다지다가 역습을 통한 효율적인 축구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상대팀에 따라 전술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축구를 잘 구현할 수 있는 감독이 한국 축구에 딱 맞는 적임자다.
그에 비해 홍명보 감독은 이번 조별리그에서 상대팀에 따라 전술적 변화가 거의 없었다. 한국 축구에는 가장 잘 맞지 않는 전술적으로 무능한 감독을 사령탑 자리에 떡하니 데려다 놓은 셈이다.
김환 JTBC 해설위원은 “대표팀 감독 선임은 한국 축구의 지향을 정한 뒤 감독이 어떤 축구를 추구하는지, 팀을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봐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력강화위원회 위원들의 인간적인 선택,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선택이 더 많이 이뤄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도 “과거 기술위원회처럼 축구 전문가 집단에서 내부적 치열한 논의를 거쳐 감독을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을 다시 회복시켜줘야 한다. 현재처럼 전력강화위원회가 추천만 하고 최종 결정권이 다른 곳에 있는 구조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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