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세에도 정규투어를 떠나지 않는 이유
평생직장. 요즘 그런 게 어딨느냐고들 한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정년 걱정도 없고, 성과가 떨어진다고 잘릴 일도 없다. 출산과 육아로 자리를 비워도 출전 자격은 그대로다. 그래도 그는 매일 가장 먼저 나와 가장 늦게까지 남는다.
쉽지 않다. 근력은 해마다 떨어진다. 쌍둥이를 낳은 뒤로는 더 그렇다. 예전 같으면 가볍게 넘겼을 실수도 이제는 만회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함께하는 후배들과는 어느덧 띠동갑 넘게 차이가 난다. 힘들지 않냐고 묻자 그는 덤덤하게 답했다.
“아닌 걸 알면서도 계속하는 것 같아요. 왜 굳이 이 고생을 하나 싶을 때도 많죠.”
매번 실력 차이를 확인하면서도 경쟁을 멈추지 않는다.
그와 함께 정상을 누비던 또래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곳에서는 여자가 결혼과 출산 이후 현장을 떠나는 일이 자연스럽게 여겨져 왔다.
반면 남자는 마흔을 넘겨도, 쉰을 바라봐도 현역으로 뛰는 일이 낯설지 않다. 오래 뛰는 것이 당연한 세계다.
그는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 결혼했고, 쌍둥이를 낳았고, 다시 돌아왔다.
골프에는 ‘평생직장’에 가장 가까운 제도가 있다. 영구 시드다.
KLPGA 투어가 상금 순위를 인정하는 대회에서 통산 20승(현재 기준 30승) 이상을 거둔 선수에게만 주어지는 자격이다. 한 번 얻으면 원하는 대회에 언제든 출전할 수 있다. 몇 년을 쉬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그 특권에 기대지 않았다. 엄마가 된 뒤에도 매주 정규 투어를 돌며 어린 선수들과 경쟁한다. 올 시즌도 모든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안선주(39)다. 두 아이의 엄마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권이잖아요. 그 특권으로 어린 선수들과 필드에서 치열하게 경쟁할 기회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제 인생에선 영광이죠.”
테니스 라켓 놓고, 골프 클럽 들었다
시작은 골프가 아니었다. 라켓을 쥔 소녀였다. 테니스 선수를 꿈꾸던 소녀의 마음을 돌려놓은 건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맨발 투혼을 펼치며 온 국민을 울린 박세리였다. 그렇게 ‘박세리 키즈’가 되어 골프채를 잡은 지 다섯 달 만에 80타의 벽을 깼다.
2005년 KLPGA에 입회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국내에서만 7승을 거두며 일찌감치 정상급 선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시선은 곧장 세계로 향했다. 또래에는 박인비, 최나연 등 훗날 세계를 제패할 천재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안선주도 L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에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고질적인 다리 부상이 앞을 가로막았다. 미국행의 문턱에서 과감히 방향을 틀었다. 2010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일본(JLPGA)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았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일본 선수들 사이에서 홀로 버텨야 했다. 그에게는 결과 말고는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적응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데뷔전인 다이킨 오키드 레이디스에서 곧바로 우승했다. 데뷔 첫해 한국인 최초로 JLPGA 투어 상금왕에 올랐고, 이듬해에도 정상에 서며 2년 연속 상금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안선주를 레전드로 만든 건 화려한 시작이 아니라 오래 버틴 시간이었다. 일본에서만 10년 넘게 뛰며 상금왕 네 차례, 통산 28승을 기록했다. 통산 상금은 10억엔(약 100억원)을 돌파했다. 일본 무대에서 통산 상금 100억원을 넘긴 한국 선수는 그가 세 번째였다.
국내 7승까지 더해 통산 35승. JLPGA 투어 한국인 최다승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여자 골프에서 단 일곱 명만이 가진 자격, 영구 시드를 손에 넣었다. 그렇게 그는 ‘평생직장’을 얻었다.
가장 잘할 때,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 정상의 자리는 외로웠다. 일본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날에도 대회를 마치고 숙소 거울 앞에 서면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우승은 쌓였지만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정점에 서 있을 때 오히려 그는 골프를 그만두고 내려오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박수받을 때 떠나는 것은 모든 선수의 로망이다. 하지만 평생 전부였던 클럽을 내려놓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모든 선수의 꿈이잖아요. 가장 잘할 때 그만두는 거요. 그런데 막상 하려니까 안 되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서 골프를 보는 마음도 달라졌다.
“어릴 때는 골프가 너무 미웠어요. 그런데 지나고 나니 미웠던 건 골프가 아니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동료들과 바둥거리며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미웠던 거죠. 골프 자체가 미운 적은 없었어요. 즐기는 법을 몰랐을 뿐이지.”
골프를 친 지 26년째. 후회는 없다고 했다.
레전드는 현재진행형
지난 27일 KLPGA 맥콜·모나용평 오픈이 열린 강원도 평창 버치힐 컨트리클럽. 고저차가 심해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 코스에서 안선주는 2002년생 양효리와 같은 조에서 라운드했다. 열다섯 살 차이였다.
영구 시드가 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새벽같이 나와 연습하고 코스를 돌았다. 스무 살 어린 후배들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그 하루가 새롭다고 했다.
“이 선수 저 선수 다 겪어 보는 게 늘 새롭죠. 우리 선수들이 참 잘 크고 있구나 싶고, 그 안에서 나도 열심히 살고 있구나 싶고요.”
물론 비거리의 장벽은 매번 실감한다. 한때는 장타자였지만, 근력은 예전 같지 않다. 아픈 곳이 하나둘 늘면서 연습량도 줄었다.
“20대, 30대, 40대가 다르듯 나이가 들수록 감각도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그걸 받아들이고 대처를 해야 하는데, 아직 그 방법을 못 배운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천천히 배우는 중이에요.”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올 때도 많다. ‘왜 굳이 비거리 차이를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뛰어야 하지?’ 싶지만서도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으려고 해요. 부정적인 것보다는, 그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늘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요.”
올 시즌 중계 현장에서 안선주를 지켜본 음창윤 SBS골프 PD는 그를 “현재형 레전드”라고 표현했다. 엄마 골퍼이자 베테랑으로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팬들에게는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라는 의미다.
“성장하는 루키를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죠. 하지만 현역으로 뛰는 레전드의 플레이는 다릅니다. 한국 여자 골프가 걸어온 길과 나아갈 방향을 함께 보여주거든요.”
내후년이면 만 41세. 시니어 무대에 설 수 있는 나이가 된다. 정규 투어를 뛰면서, 챔피언스 투어에도 함께 나설 생각이다. 그곳에선 다시 신인이 된다. 그게 설렌다고 했다.
“정규는 정규대로 매력이 있지만 챔피언스(투어)로 가면 제가 또 루키가 되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재미있을 것 같고 기대돼요.”
‘열심히 살았던 엄마’로 기억되길
코스 밖에서는 여섯 살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엄마다.
대회가 없는 날이면 아침 일찍 아이들을 등원시킨다. 그 사이 틈을 쪼개 체력 운동을 한다. 남편의 헌신과 친정 부모님의 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여정이다.
아이가 골프장에 오는 일은 드물다. 한 번 데려왔다가 혼이 났다.
“150m 밖에서도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보는 분들은 귀엽다지만, 저는 안 귀여워요.”
웃으며 말했지만, 아이를 골프장에 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진심이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고된지 알기 때문이다.
“제 자식은 골프를 안 쳤으면 좋겠어요. 제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 길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거든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많지 않다. 투어 기간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얼굴 보는 게 전부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늘 ‘집에 잘 안 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걸 안다.
“자랑스러운 엄마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나중에 아이들이 컸을 때, ‘우리 엄마가 참 매 순간 열심히 살았구나’, 그것 하나만 기억해 주면 더 바랄 게 없어요.”
누군가는 영구 시드를 ‘평생직장’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안선주에게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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