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민기록관으로 향한 낡은 상자 속에는 한 가족의 60년 세월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졸업장과 성적표, 손때가 묻은 통지표, 군 복무를 마치고 받은 전역증, 오래전 발급된 도민증까지…. 누군가에게는 다락방 한구석의 오래된 종이였지만, 지역에서는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이 됐다.
전주시가 올해 제15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서 최우수 기록물로 선정한 박종탁(74) 씨의 가족 생활사 자료는 그렇게 시작됐다. 옹기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와 8남매가 받았던 상장, 성적표, 졸업장, 표창장, 앨범, 병역 수첩 등 모두 104점.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진 평범한 한 가족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31년 발급된 전주제이공립보통학교(현 전주완산초등교) 졸업증서다. 일제강점기 교육 현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문서는 한 소년의 졸업장을 넘어 당시 지역사회의 교육 환경과 시대 분위기를 보여준다. 1954년 발급된 전라북도민증은 전쟁 직후의 생활상을 전하고, 1962년 국제자동차 운전면허증은 산업화와 이동의 시대를 상징한다. 1980년 전역증서와 병역 수첩은 또 다른 세대의 청춘과 국가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한 가족의 성장 과정이 곧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심사위원들은 “평범한 가족의 일상이었지만, 그 기록들이 쌓이면서 도시의 역사와 시대의 풍경이 된 생활사 자료”라며 “버리지 못한 오래된 종이와 빛바랜 사진 한 장 속에 남겨진 기억들이 어떻게 지역의 역사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올해 공모전에는 ‘여행’ 부문과 ‘전주’ 부문에 걸쳐 총 34건 378점의 기록물이 접수됐다.
그 중 가장 시선을 붙든 것은 사라진 전주의 풍경이었다. 1950년대 덕진공원의 단오 풍경을 담은 흑백사진과 포도밭이 펼쳐졌던 1967년 인후동 과수원 모습, 철길과 기자촌이 남아 있던 1976년 덕진공원 인근의 풍경, 1970년대 삼남여객 버스 사진 등은 지금의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여행 부문에서는 1968년 전북도박물관 입장권과 1973년 서울∼전주 간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승차권이 눈길을 끌었다. 화장실과 냉난방 시설을 갖춘 미국산 대형 버스가 ‘최첨단 교통수단’으로 여겨졌던 시절의 흔적이다.
누군가는 오래된 종이를 버리지 못했고, 누군가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간직했다. 세월은 사람을 떠나보내고 풍경을 바꾸지만, 종이 한 장은 그 시간을 붙잡아 둔다. 아버지와 8남매가 남긴 104점의 기록은 그렇게 한 가족의 기억을 넘어 전주의 시간으로 남게 됐다. 그렇게 남겨진 기억들은 이제 개인의 추억을 넘어 시민 모두가 공유하는 기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주시는 기증자들에게 증서와 함께 5만∼50만원 상당의 보상금을 온누리상품권으로 지급한다. 수집된 자료는 전주시민기록관에서 전문적으로 보존해 향후 전주 기록사진 전시회와 각종 기록문화 사업에 활용할 계획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개인의 추억과 가족의 역사가 모여 도시의 역사가 된다”며 “시민들이 간직한 소중한 기록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보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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