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자식은 서로를 이해하게 돼
상처 넘어 사랑을 발견하는 여정
오늘도 있는 힘껏 최선 다하리라
이아 옌베리 ‘비르기테’(‘기억의 순간들’에 수록, 우아름 옮김, 문학동네)
장편소설인데 나에게는 네 편의 단편으로, 연작소설로 읽어도 무방했던 책이 있다. 스웨덴 작가 이아 옌베리의 ‘기억의 순간들’. 수록된 작품 모두 이름이 제목인 명명법으로 쓰였고 그중 엄마 이야기인 ‘비르기테’가 떠올랐던 건 최근에 읽은 신간들 때문이다. 이 지면에 ‘벌’이라는 단편으로 소개했던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가는 장편 ‘상상 속의 삶’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의 어머니에 대한 전기이자 에세이인 ‘어머니 내게 오시네’를 읽은 후. 이 책들의 공통점은 모두 작가인 자식이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해 기록했다는 점인데 출발은 조금 다른 듯해도 결과는 같아 보인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작가는 어느 시점이 되면 부모에 대해 쓰게 되는 걸까.
‘비르기테’의 딸이자 지금은 바이러스성 열병을 앓고 있는 ‘나’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자신을 형성한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나의 핵심은 나를 스쳐 지나간 타인들의 흔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어려운 시작과 작업일 것이다. 지난 삶에 찬란, 추억, 안타까움만 있는 게 아니라 클로즈업해서 더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무참한 기억과 상처와 진실이 속속 들춰질 테니. ‘나’ 역시 지금 글을 쓰는 사람이고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글로 써봄으로써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의 관계를 해소하거나 직면해보려는 듯하다. 비르기테라는 이름의 엄마를. 그 인물을 독자 눈앞에 바로 떠올릴 수 있게 생생히 묘사하는 표현력으로.
비르기테는 일곱 살 때 부친의 죽음을 경험했고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던” 십 대 때 생계를 위해 일하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일을 겪었다. 그때의 상처로 차츰 은둔적 성향에 불안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 상담심리, 트라우마 같은 말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고 주변의 누구도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화자가 엄마의 심리적 증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한 정신과 병원에서 입원 환자들을 상담하면서부터였다. 딸이 엄마를 이해하는 방법,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깨어 있는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그리고 “그렇게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웃을 때도 불안하게 웃고 기쁨도 걸음도 화법도 마찬가지인 사람, 기댈 만한 사람이나 물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독립’할 수 있는 사람,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어서 타인들 속에서 모나지 않게 “섞여 들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특징 없는 성격이 특징인 사람, 모서리에 가까이 놓인 유리잔을 가장 먼저 치우는 사람, 언제 일어날지 모를 사고를 찾아내려 주위를 면밀히 주시하는 사람, 다른 이의 의견이 더 일리 있어 보이면 언제든 자신의 말을 바꿀 준비가 된 사람, 불안이 본성이 돼 버린 사람. 눈에 수줍음이 가득한 사람, 가끔은 매일이 좋은 날이라고 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비단 비르기테만일까. 그녀는 그런 사람으로 자랐고 결혼했고 집과 가족을 떠났고 자기 자신을 찾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분투했다.
비르기테의 무덤 앞. 화자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친구와 서 있다. 열은 내렸고 오랜 상처가 터지듯 마침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세월이 얇은 장막 뒤에서”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 드는 지금,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누구’와 관련된 순간의 밀도만이 현재에 의미를 준다고 느낀다. 친구가 커피 병을 들어 올리며 묘지의 모두에게 말한다. “나중이면 너무 늦어.” 그러니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언젠가 부모 이야기를 쓰게 될 때를 위해서, 오늘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도 지금 이 순간순간을 관찰하고 기록해 두려고 한다. 글쓰기가 목적의 전부가 아니라 기록을 지속하는 행위를. 과거와 현재, 자아와 가장 강렬한 타자가 의미 있게 뒤섞인 그 기록이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이해나 용서가 되려면. 아니 그 글의 결과인 사랑의 발견이 빠진 이해와 용서의 이야기는 부모에 관해서라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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