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료·퇴직급여에 숙련자 임금까지 ‘줄인상’
“더 오르면 채용 축소”…업종별 구분 적용 요구
“신입 215만원 주면 경력직은요?”
책상 위 계산기에 215만6880원이 찍혔다. 올해 최저임금 시급 1만320원에 월 환산 기준 209시간을 곱한 액수다. 주 40시간 일하고 유급주휴 8시간을 더한 셈이다.
사업주가 떠안는 부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임금이 오르면 거기에 연동된 사회보험료와 퇴직급여 부담도 함께 불어난다. 신입 급여를 올리면 기존 숙련 직원 임금도 같이 손봐야 한다는 압박이 뒤따른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소상공인 994개사를 조사한 결과 77.6%가 올해 최저임금이 경영에 부담된다고 답했다. ‘매우 부담스럽다’는 응답이 30.5%, ‘다소 부담스럽다’는 응답이 47.1%였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신입 임금만 오르는 게 아니라 사회보험료와 퇴직급여, 기존 직원 임금까지 줄줄이 끌려 올라간다. 중소기업계가 내년도 최저임금 동결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연쇄 부담을 우려해서다.
중소기업계는 24일 서울 여의도 중기중앙회에서 ‘중소기업·소상공인 생존을 위한 최저임금 결정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최소한 숨을 쉴 수 있도록 내년도 최저임금을 현재 수준으로 동결해달라”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에는 이재광 중기중앙회 노동인력위원장과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위원인 윤영발 한국자동판매기운영업협동조합 이사장, 금지선 한국메이크업미용사회 회장, 이기재 한국펫산업연합회 회장 등 업종별 대표들이 참석했다.
◆신입 급여 오르면 숙련자 임금도 조정
현장에서 느끼는 부담은 시급 인상분에서 멈추지 않는다. 임금이 오르면 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 등 사업주가 부담하는 사회보험료도 함께 늘어난다. 퇴직급여 산정의 기초가 되는 임금이 오르면 장기적으로 퇴직급여 부담도 커진다.
최저임금보다 높은 급여를 받던 기존 직원과의 임금 격차도 문제다. 신입사원의 임금이 숙련자 급여에 가까워지면 근속연수와 숙련도에 따라 짜 놓은 임금표 전체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
곽인학 한국금속패널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최저임금과 연동된 4대 보험료와 퇴직금 등 각종 법정 비용이 있어 최저임금이 몇십원이라도 오르면 기업이 감당해야 할 인건비는 훨씬 큰 폭으로 오른다”고 말했다.
기존 숙련 기술자의 급여를 그대로 두면 신입사원과 임금이 비슷해지거나 역전될 수 있다. 숙련자 이탈을 막으려면 최저임금을 웃도는 근로자의 급여까지 함께 올려야 한다는 게 중소기업계 설명이다.
◆비수도권 81.5% “현재 수준도 부담”
최저임금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비율은 비수도권에서 더 높았다. 비수도권 기업의 부담 응답률은 81.5%로 수도권 74.2%보다 7.3%포인트 높았다. 같은 최저임금을 적용받더라도 지역과 업종에 따라 매출 규모와 임금 지급 여력이 다르다는 게 중소기업계 주장이다.
내년도 최저임금의 적정 변동 수준으로는 동결이 41.6%로 가장 많았다. 인하가 필요하다는 응답도 21.0%였다. 조사 대상의 62.6%가 내년도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올리지 않아야 한다고 답한 셈이다.
올해 경영 상황이 지난해보다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은 60.4%였다. 매출 10억원 미만 기업과 종사자 1∼9인 사업장에서 경영 악화를 예상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최근 3년간 임금과 사회보험료 등 인건비가 늘어난 데 대해 43.6%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영업이익이 줄었다고 답했다.
영업비 등 다른 비용을 줄였다는 응답은 24.6%, 제품·서비스 가격이나 납품단가에 반영했다는 응답은 21.3%였다. 인건비가 올라도 판매가격이나 납품단가를 높이지 못한 업체가 적지 않았다는 의미다.
◆감당 못하면 채용부터 줄인다
인건비 부담을 가격이나 납품단가에 반영하기 어려운 업체들은 고용을 먼저 줄이겠다고 답했다.
감내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최저임금이 오를 경우 신규 채용을 축소하겠다는 응답이 24.6%로 가장 많았다. 기존 인력을 감원하겠다는 응답은 24.0%, 임금을 동결하거나 삭감하겠다는 응답은 22.0%였다. 사업 종료를 검토하겠다는 응답도 8.7%였다.
이기재 한국펫산업연합회 회장은 “현장에서는 인건비가 ‘임계점에 왔다’, ‘더 이상 조절 가능한 항목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지난해보다 올해 중소기업 근로자의 임금은 평균 4.0% 올랐다. 임금 인상률을 정할 때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최저임금 인상률이 52.3%로 가장 많이 꼽혔다. 영업이익 등 회사 경영 실적이 47.2%, 직원 개인의 업무 성과가 20.3%, 물가상승률 등 경제지표가 19.4%로 뒤를 이었다. 복수 응답 결과다.
최저임금이 그 돈을 받는 근로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사업장 전체 임금 체계를 떠받치는 기준선으로 작동한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업종별 구분 적용 요구 이어가
중소기업계는 업종마다 생산성과 임금 지급 능력이 다른 만큼 최저임금을 구분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사 대상의 76.1%는 업종별 구분 적용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최저임금법은 사업 종류별로 최저임금을 구분해 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 구분 적용이 이뤄진 것은 제도 시행 첫해인 1988년뿐이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서도 구분 적용 여부가 논의됐지만 부결됐다. 중소기업계는 “취약 업종의 생존과 회복을 위해 업종별 구분 적용이 시행될 수 있도록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가장 시급한 제도 개선 사항으로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정부 지원 신설·확대가 34.5%로 가장 많이 꼽혔다. 업종별 구분 적용은 28.7%로 뒤를 이었다. 매년 정하는 최저임금 결정 주기를 2∼3년으로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노동계의 입장은 다르다. 근로자위원들은 내년도 최저임금 최초 요구안으로 올해보다 16.3% 높은 시급 1만2000원을 제시했다. 월 209시간을 적용하면 250만8000원이다. 최근 수년간 낮은 인상률이 이어졌고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동결은 실질임금 삭감이라는 주장이다.
사용자위원들은 올해와 같은 1만320원을 제시했다. 노사의 최초 요구안 격차는 1680원이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은 늘지만, 임금 지급 여력이 부족한 사업장은 채용을 줄이거나 기존 임금 체계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
남은 심의에서는 노동자의 생계 보장과 영세 사업장의 지급 능력 사이에서 어느 수준의 균형점을 찾을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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