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쓴 참전수기 육군에 기증
명패에 새겨진 전우 김병칠 상사
산두곡산 전투서 잃은 상관이자 전우
어린 전우들의 희생 아직도 가슴속에
기말고사 치른 뒤 전장터로
엔지니어 꿈꾸며 간직하던 학생증
전장에 묻을 땐 꿈도 찢겨나간 듯
한때 기록 속엔 ‘전사자’
30대 때부터 전장의 참상 기록 시작
軍 기록 오류 바로잡아 생존자로
기억, 계승… 살아남은 자의 의무
軍 “평화 지킨 선배들 뜻 이어받아
국민 지키는 본연의 임무 다할 것”
1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은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힘겨워 보였지만 단정하게 몸을 가다듬었다. 노인의 눈길이 향한 곳에 ‘김병칠 이등상사’의 이름이 있었다. 6·25전쟁 참전용사 한희나(96)씨가 75년 만에 마주한 전우였다. 경례를 올리는 한씨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것이 전쟁 중 세상을 떠난 전우를 향해 자신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의라 여겼을 것이다.
김병칠은 한씨에게 전사자 명단 속 한 줄로만 남은 사람일 수 없다. 목숨을 건 수색에 먼저 나섰고, 표현이 서툴긴 했지만 부상당한 부하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상관이자 전우였다. 한씨는 전쟁 당시 수도사단 기갑연대 직할 수색중대 소속으로 입대했고, 1951년 6월 동부전선 산두곡산전투에 참전했다. 비오듯 쏟아지는 북한군의 총격을 피해 함께 몸을 숨겼던 김병칠은 어느 순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씨는 자신의 왼쪽에 누워있던 김병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급하게 손을 더듬었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전사 소식을 전한 것도 그였다. 지난 22일 찾은 충남 계룡대 육군본부 ‘명예의 전당’에서 김병칠의 이름을 마주한 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육군은 6·25전쟁 발발 76주년을 앞두고 한씨를 계룡대로 초청했다. 이날 일정은 육군기록정보관리단 방문과 수기 기록물 기증, 전투 기록 확인, 명예의 전당 추모, 기록물 복원 현장 견학으로 이어졌다. 전장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의 의미를 기억의 당사자인 참전용사와 함께 되새기는 자리였다.
한씨의 기억은 지도 위에서 되살아났다. 적 병력 배치, 부대 이동경로를 표시한 지도 앞에서 그는 주용선 육군기록정보관리단장에게 “수도사단은 어디예요?”라고 물었다. 주 단장이 전투 지역을 짚어주자 당시를 떠올리는 듯 시선은 지도에 표시된 오래전 전장을 따라 움직였다.
한씨는 이날 30대 초반부터 직접 작성한 기록물을 육군에 기증했다. 오래된 종이에는 전투의 기억과 전우들의 이름, 살아남은 사람의 시간이 담겼다. 참전용사 한 사람의 기록이 육군의 보존 체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육군은 빛바랜 종이와 흐려진 글씨를 되살려 전쟁의 기억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기록을 복원하고 있다. 한씨의 기증품도 이런 과정을 거칠 것이다. 육군기록정보관리단은 2020년부터 6·25전쟁 군사기록물 8만1420점을 중요 역사기록물로 선정해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까지 복원된 자료는 절반이 넘는 4만9040점이다.
이날 한씨가 초청된 것은 참전용사인 그가 기억의 당사자인 동시에 ‘기록의 효용’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한때 국립묘지 서류에 ‘전사자’로 되어 있던 그는 군번과 원적 등 다른 기록을 대조한 뒤에 생존 참전용사로 확인됐다. 또 ‘전장에 두고 온 학생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은 후세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자료다. 한씨는 엔지니어의 꿈을 품고 입학한 흥남공업대학교 전기과 1학년에 재학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뒤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꿈을 간직한 채 늘 학생증을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하지만 수색 임무 중 북한군이 모여들자 잠복했고, 신분이 드러나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학생증을 찢어 버렸다. 학생증은 단순한 학교 출입증이 아닌 꿈의 증거물이었다. 한씨는 그때의 기억을 책 ‘전장에 두고 온 학생증’으로 써 내려갔다.
조희제 공군 병장은 이 책을 읽고 6·25를 일상에서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헌신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조 병장은 특히 계곡물로 밥을 지어 먹은 뒤 다음 날 그 물에 시신이 떠 있던 것을 보고 구토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고 했다. 한씨가 전장에 두고 온 학생증은 자신의 병역증과 겹쳐 보였다. 그는 “학생증은 학업을 이어가려는 스스로의 자유의지라면, 병역증은 모두의 자유를 위한 희생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참전했던 선배들의 희생을 추모하게 됐다고도 했다.
이 책을 읽은 간호학 전공 학생 4명은 한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 당시 상황과 참전용사들의 감정, 고민을 생생하게 느꼈다며 “현재의 자유도 그때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감사함을 전했다. 책을 읽은 이들에게 6·25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누리는 평화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질문이 됐다. 한씨는 “70여 년이 지났지만 전장에서 함께 했던 전우들의 희생은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육군은 “국민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온 선배 전우들의 희생과 헌신은 오늘의 장병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며 “그 헌신을 기억하고 계승해 국민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겠다”고 밝혔다.
국가보훈부는 한씨를 비롯한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는 6·25전쟁 제76주년 기념식을 25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연다. 행사에는 참전유공자와 미래세대, 정부·군 주요 인사, 주한 참전국 외교사절 등 1000여명이 참석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참전유공자의 후손 장병인 최대원 육군 대위가 낭독하고, 비정규군 공로자 3명에 대한 무공훈장 수여식도 진행될 예정이다. 에티오피아 파병부대인 ‘강뉴부대’ 후손들로 구성된 강뉴합창단도 참석해 아리랑 공연을 선보인다. 보훈부는 전사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자는 취지의 헌정패를 전몰·순직군경 유족 3만5000여명에게 순차적으로 수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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