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후반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육군을 보유한 나라가 프랑스라는 데 군사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었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나치 세력이 대대적인 군비 확장에 나섰으나 영국은 프랑스만 믿고 방어 준비를 게을리했다.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과 세계 최강의 프랑스 육군이 힙을 합치면 독일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이듬해인 1940년 6월 프랑스가 신속히 독일에 항복했을 때 처칠은 아연실색했다. 프랑스인들로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참패였다. 참전 군인 마르크 블로크(1886∼1944)는 프랑스군의 패인을 분석한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이란 저서를 남겼다. 이 책에서 블로크는 “내각과 의회는 평화주의에 빠진 채 분열됐고, 군은 독일의 획기적 병력 증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며 한탄했다.
블로크는 군인 이전에 저명한 역사학자다. 오늘날에도 “인류학, 경제학, 사회학을 통합해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9년 2차대전 발발 당시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경제사를 가르치는 교수였다. 나이는 53세에 부인과 여섯 자녀까지 대가족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기도 했다. 더욱이 블로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전선에서 복무했다. 육군 당국이 “당신은 예비군 동원 대상이 아니다”라며 만류했으나, 블로크는 우격다짐 끝에 대위 계급장을 달고 군인으로 복귀했다. 하나 프랑스군의 패전 그리고 조기 항복 탓에 그는 군복을 벗고 강단으로 돌아가야 했다.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교수 직위도, 자택도 뺴앗긴 블로크는 1943년 반(反)독일 저항군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부인 시몬 비달(1894∼1944)은 남편과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적극 도왔다. 전세가 독일에 불리해지며 게슈타포(비밀 경찰)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1944년 3월 독일 당국에 붙잡힌 블로크는 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그해 6월16일 총살됐다. 미국, 영국 등 연합국 군대가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으로 프랑스 해방에 돌입한 지 꼭 열흘 만이었다. 남편의 체포 소식을 듣고 그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시몬도 지병인 위암이 악화해 1944년 7월2일 사망했다. 학자들은 남편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실을 시몬은 몰랐을 것으로 추정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3일 프랑스 파리 팡테옹에서 블로크 부부의 이장(移葬)을 상징하는 의식이 엄수됐다. 팡테옹은 프랑스 최고의 위인들이 안장된 곳으로 우리 국립현충원에 해당한다. 유족이 무덤을 옮기는 것은 바라지 않아 두 개의 관에는 고인들이 생전에 받은 훈장, 옛 사진 그리고 자녀들과 교환한 서신 등이 담겼다. 직접 행사를 주관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연설에서 1940년 같은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듯 “프랑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블로크 부부 등 애국자들의 조국으로 남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리옹 근처 어느 들판에서 사형이 집행될 당시 블로크는 총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비브 라 프랑스”(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가사노동의 가치](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6/24/128/20260624519450.jpg
)
![[세계포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항미원조’](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2/04/128/20260204518473.jpg
)
![[세계타워] 막힌 물길, 세계가 배운 것](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3/04/128/20260304519905.jpg
)
![[한국에살며] 전 세계인의 문화가 된 축구](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6/24/128/20260624519326.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