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코스 달려온 사실만으로도 친밀감 느껴
지난 6월7일, 제주국제관광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김녕을 출발해 월정, 평대와 한동을 지나 종달 쪽으로 이어지는 동쪽 해안길을 달리는 왕복코스였다. 기록은 3시간59분. 간신히 네 시간 안쪽으로 들어왔다.
길은 앞으로 나 있었지만 옆에서는 바다가 계속 따라왔다. 흐린 하늘 아래 일렁이는 물결, 바람에 흔들리는 풀, 낮은 돌담, 해안마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풍광은 압도적이었다. 달리면서 여러 번 생각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런 마라톤 코스는 없을 것 같다고.
바람은 정면에서 몸을 막아서고, 옆에서 흔들고, 뒤에서 등을 떠밀다가 어느 순간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출발하자마자 내린 비에 옷과 신발이 흠뻑 젖었다. 제주 바다는 아름다웠지만, 아름다움이 달리기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도 차가워진 손끝과 뻣뻣한 다리는 여전히 길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완주 뒤 내가 찾아간 곳은 ‘김녕용암해수사우나’였다. 탈의실에는 마라톤을 마친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누군가는 젖은 러닝복을 벗느라 애를 먹었고, 누군가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웃었다. 누군가는 기록을 확인했고, 휴대전화로 가족과 친구에게 완주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진짜 힘들었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참았다”, “눈물이 났다” 같은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목욕탕 탈의실이 아니라 마치 운동장 라커룸 같았다.
탕 안으로 들어가자 목욕탕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어 있었다. 물소리와 말소리가 둥글게 울려 퍼졌다. 청년들의 목소리에서는 흥분이 느껴졌다. “월정 지나면서 진짜 그만두고 싶었어요.” 한 사람이 웃으며 말하자, 옆 사람이 “나는 신발 안에서 바다가 출렁이는 줄 알았다”고 받았다. 첫 풀코스였다는 청년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내가 꽤 끈질긴 사람이란 걸 깨달았어요”라고 했다.
누군가는 달리기를 시작한 뒤 술자리가 줄었고, 밤마다 시달리던 불안도 조금 옅어졌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견디려고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오늘 결승선을 지나면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그 말들을 듣고 있으니,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목욕탕과 사우나가 주목받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러닝을 마친 뒤 사우나를 즐기는 ‘사우나 런’, 목욕탕에서 열리는 명상 모임, 온라인에서 동행을 구해 함께 목욕을 즐기는 모임도 생겼다고 한다. 이 현상은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니다.
사회에서는 서로를 직업, 나이, 옷차림, 말투, 성과로 구분하지만 탕 안에서는 그런 것들이 잠시 사라진다. 누구나 땀을 흘렸고, 누구나 지쳤고, 누구나 몸을 데우러 왔다. 끝없는 비교와 성과의 압박, 뒤처지면 안 된다는 긴장 속에서 괜찮은 사람처럼 버텨야 하는 청년들에게는 평가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 몸의 감각으로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뜨거운 물 속에 앉아 러너들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들이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느껴졌다. 같은 비를 맞고, 같은 바람을 견디고, 같은 결승선을 지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친밀감이 생겼다. 목욕탕은 비바람 속을 견디고 온 사람들이 차가워진 몸을 데우고, 다시 살아갈 힘을 되찾는 회복의 장소였다. 그날 내게 제주국제관광마라톤의 결승선은 김녕의 목욕탕이었다.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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