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반도체 수출 메모리 비중 90%
D램 대체재 등장 땐 국내 경제 흔들
中 저가 공세 치킨게임도 안심 못해
‘100조’ 삼전·닉스 반짝 효과 될지도
‘비메모리·팹리스’ 분야 육성 목소리
시스템 반도체 세계 점유율 2% 불과
산업 생태계 두터운 대만과 대조적
“특정 품목 편중 위험… 자원 배분해야”
“한국 반도체는 인공지능(AI) 혁명의 심장이다.”
일명 ‘돈나무 언니’라고도 불리는 월가의 큰손 캐시 우드 아크인베스트먼트 최고경영자(CEO)가 내린 평가다. 지난 16일 국내 한 증권사 유튜브에 출연한 그는 “AI 확장의 가장 큰 수혜를 볼 것”이라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잠재력과 경쟁력을 호평했다. 말 그대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역대급 호황을 질주하고 있다. 반도체 수출액은 3년 연속 300억달러(약46조1550억원)를 넘어섰고, 반도체 기업 쌍두마차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 1분기에만 각각 57조2000억원과 37조6103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그야말로 ‘한국 반도체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하지만 화려한 실적 뒤에 가려진 그늘도 짚어봐야 한다.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주체가 메모리 반도체에, 그것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기업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두 회사의 존재감이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한국 반도체 산업의 약한 고리들은 잘 안 보이거나 무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만약 메모리 호황이 꺾이거나, 메모리 반도체를 대체할 새로운 제품이 등장할 경우 한국 반도체 생태계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특정 품목과 소수 기업에 기댄 구조에서 벗어나 국내 반도체 생태계 전체를 두텁게 다지는 방향으로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제언한다.
◆반도체 수출 90%가 메모리인데 위협 신호
23일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이달 들어 20일까지 전체 반도체 수출에서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달했다. 기존에는 메모리 반도체의 비중이 70% 수준이었는데, D램과 낸드, 고대역폭메모리(HBM)까지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규모가 더 커졌다. 시스템 반도체를 포함한 비(非)메모리는 수출 규모가 10%에 그쳤다.
업계 일각에서 ‘메모리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우려하는 대목이다. 지금은 한국산 메모리 수요가 폭증해 문제가 없지만, 현재 메모리 반도체를 압도하는 기술이 나오거나, 한국을 대체할 메모리 반도체 공급처가 등장하면 한국 반도체 산업을 넘어 우리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메모리의 아성을 위협하는 신호는 이미 곳곳에서 감지된다. 미국 기업들은 D램을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반도체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달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세레브라스 시스템스’다. 세레브라스가 택한 길은 반도체 업계의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는 방식이다.
통상 반도체는 둥근 웨이퍼 위에 칩 수백 개를 만든 뒤 이를 잘라내 쓴다. 칩이 작아야 웨이퍼 일부에 결함이 생겨도 나머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세레브라스는 300㎜ 웨이퍼를 자르지 않고 통째로 하나의 칩처럼 쓴다. 이른바 ‘웨이퍼 스케일 엔진(WSE)’으로, 연산장치와 메모리를 한 칩 안에 최대한 붙여 넣어 현재 반도체 기술의 고질적인 문제인 메모리 병목현상을 해소하겠다는 발상이다.
현재로서는 이런 방식이 기존 반도체보다 수율(양품의 비율)이 낮아 활용성이 떨어져 큰 위협은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세레브라스가 수율 문제를 극복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메모리 병목과 전력 효율 측면에서 현재 메모리 체계를 압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국을 추격하는 중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최근 메모리 초호황은 한국 기업뿐 아니라 중국 최대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에도 천운으로 작용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에 밀려 만년 적자 신세였던 CXMT는 반도체 공급부족에 힘입어 올해 1분기에만 354억위안(약 8조386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흑자 전환에 힘입어 CXMT는 중국판 나스닥이라 불리는 ‘과창판(과학기술혁신판)’에 상장할 준비를 마쳤다. 상장에 성공하면 CXMT는 6조원이 넘는 자금을 손에 쥐게 된다. 그동안 쌓인 적자를 일거에 털어내는 것은 물론 본격적으로 생산능력을 늘리고 기술을 개발할 ‘실탄’을 확보하는 것이다.
CXMT는 상장 전 지분의 36%를 허베이성 지방정부와 국가 반도체 펀드가 보유하는 등 사실상 국가의 전폭적 지원으로 큰 회사다. 향후 이들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적자를 감수하고 압도적으로 싼 가격에 메모리를 내놓는 ‘치킨게임’을 벌인다면 한국 기업 입장에선 쉽지 않은 싸움을 벌여야 한다.
◆반도체 시스템 생태계 전체 키워야
전문가들은 AI시대를 맞아 한국 반도체 산업이 지속가능한 생존력을 갖추려면 메모리가 꺾여도 이를 받쳐 줄 비메모리와 팹리스(설계) 분야를 키울 필요가 있다고 한다. 특정 품목과 소수 기업에 기댄 구조에서 벗어나 생태계 전체를 두텁게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비메모리와 팹리스 산업은 규모 자체가 경쟁국에 한참 못 미친다. 한국의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2024년 기준 2%에 불과해 미국(72%), 대만(8%)과 큰 격차를 보였다. 전 세계 팹리스 스타트업 중 한국 기업 비중은 3.8%로 중국(35.5%)과 미국(20.2%)에 크게 뒤처진다. 국내 팹리스 스타트업의 약 95%도 아직 초기 투자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들 스타트업을 키워 팹리스 → 전공정 → 후공정으로 이어지는 반도체 생태계를 확고히 구축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모범사례로 거론되는 곳이 대만이다. 대만은 세계 1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의 위상이 압도적이지만 TSMC 한 곳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아래로 미디어텍, 리얼텍, 노바텍 같은 세계적 팹리스(반도체 설계)와 UMC·PSMC 등의 파운드리, ASE·파워텍 등의 후공정 기업이 두루 포진해 있다.
팹리스가 설계를 주문하면 파운드리가 전공정을, 후공정 업체가 패키징과 검사를 맡는 수직적 분업 구조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대만 반도체산업에는 설계기업 262곳, 제조기업 15곳, 후공정기업 37곳이 존재한다. 대기업이 산업을 주도하면서 중소기업 성장이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한국과 달리, 대만은 중견·중소기업이 함께 큰 것이 핵심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특정 품목 하나만 선택해서 (자원과 자본을) 몰입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현실에 맞게 메모리 반도체 역량을 유지하면서도 비메모리를 포함한 반도체 산업 생태계 전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자원을 적절히 배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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