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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캘리그라피, 이제는 ‘그림글’이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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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은 이들이 즐겨 쓰는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아름다운 손글씨를 뜻한다.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아름다움을 뜻하는 ‘칼로스(kallos)’와 쓰기를 뜻하는 ‘그라페인(graphein)’이 결합해 ‘아름답게 쓰는 글’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말로 이 예술을 풀어보면 단순히 아름답게 쓰는 기술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글’은 생각과 뜻을 담아 적은 흔적이고, ‘그림’은 마음속 형상을 드러낸 모습이다. 국어학자들에 따르면 ‘글’과 ‘그림’, 그리고 ‘그리움’은 모두 ‘그리다’라는 하나의 어원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 그림을 그린다는 것,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의 흔적을 남기는 같은 행위인 셈이다.

허준혁 유엔피스코 사무총장
허준혁 유엔피스코 사무총장

이어령 선생 역시 글과 그림, 그리움이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고 보았다. 그의 통찰에 따르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은 모두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창조적 표현이다.

이런 맥락에서 캘리그라피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그림글’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그림글은 글과 그림, 그리고 그리움이 하나로 만나는 말이다. 단순한 번역어를 넘어 우리말 고유의 정서와 미학을 담아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캘리그라피를 ‘멋글씨’라고 부른다. 이해하기 쉽고 친숙한 표현이다. 하지만 멋글씨가 글씨의 형태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둔다면, 그림글은 그 안에 담긴 뜻과 정신까지 품는다.

멋글씨의 중심에는 글자의 모양이 있지만, 그림글의 중심에는 마음이 있다. 멋글씨가 아름답게 쓰는 기법이라면 그림글은 의미를 그려내는 예술이다. 획에는 숨결이 담기고 여백에는 사유가 머문다. 종이 위의 선과 공간이 조화를 이룰 때 글자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다시 뜻이 된다.

 

한글 캘리그라피는 한글서예의 정신과 조형미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예술이다. 자음과 모음이 지닌 구조적 아름다움 속에 감정과 의미를 담아내는 문화적 실천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지·인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다. 한글은 태생부터 형태와 의미를 함께 품은 문자였다. 따라서 한글을 쓰는 일은 단순한 기록 행위를 넘어 정신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림글은 바로 이러한 한글의 본질을 되살리는 예술이다. 붓끝의 한 획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뜻을 품은 형상이 되고, 여백은 말하지 않은 마음을 담는 공간이 된다.

 

21세기에 들어 한글 캘리그라피는 생활문화 속 대중예술로 자리 잡았다. 책 표지와 영화 포스터, 광고 디자인, 브랜드 로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손글씨가 지닌 온기와 인간적인 흔적은 더욱 특별한 가치로 다가온다.

 

옛 선비들은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닦고 글을 썼다. 산과 물의 흐름을 눈에 익힌 사람의 붓끝에는 자연의 리듬이 스며들었다. 한글서예 또한 다르지 않다. 획은 물 흐르듯 이어지고, 점은 별처럼 머물며, 여백은 산골 바람처럼 쉰다. 붓이 먹을 머금고 종이에 닿는 순간, 필획은 단순한 선을 넘어 살아 있는 숨결이 된다.

 

그 숨결이 문자와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그림글이다. 뜰에 핀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붓을 드는 순간, 글씨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다시 그리움이 된다. 그리움은 마음속에 새겨진 글이며, 그림이다. 그리고 그것을 종이 위에 담아낸 것이 바로 그림글이다.

 

이제는 외래어의 틀을 넘어 우리말의 이름을 되찾아볼 때다. ‘캘리그라피’라는 말 대신 ‘그림글’이라 부를 때 우리는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 우리 언어 속에 깃든 미학과 정신을 함께 되살릴 수 있다.

 

멋글씨가 손끝의 아름다움이라면 그림글은 마음의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림글’이다.


허준혁 유엔피스코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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