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정씨 집안이 채택한 전략의 결과
18C 서울·경기 득세 탓 문과 길 요원
출세길 막히자 차선책으로 무예 집중
활 연습장 조성·사범 초빙 ‘집중과외’
조선말까지 무과 합격자만 34명 배출
1784년 가을이었다. 경상도 선산의 한 집안에서 큰 경사가 났다. 그것도 보통 경사가 아니었다. 같은 과거시험에서 한 집안사람 넷이 동시에 합격했다. 정유관·정필수 형제와 그들의 삼촌 정필신, 그리고 먼 친족 정유철이었다. 모두 무과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이자 인척이었던 노상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정유철과 정필수가 유엽전(조선시대의 화살) 1발을 맞히고 강서에서 조(粗)를 받아 과거에 합격했으니 기특하고 다행스럽다.”
기특하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정유관은 스무 살에 활을 잡기 시작해 16년을 쏘고서야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아우 정필수 역시 그 세월이 14년이었다. 정유철은 급제했을 때 나이가 마흔둘이었다. 오래 걸렸다는 게 아니다. 그 세월 동안 이들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집안은 해주 정씨, 경상도 선산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양반가였다. 집안의 시작은 화려했다. 정붕(鄭鵬)은 16세기 초 성리학의 태두로 이름을 날렸고, 연산군에게 직간했다가 귀양을 갔다. 나중에 선산의 금오서원에 배향될 만큼 경상도에서 그의 위상은 남달랐다.
정붕의 후손들은 벽에 부딪혔다. 문과 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다. 18세기 무렵 경상도에서 문과에 합격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당시 시대가 그러했다. 서울과 경기 기반의 특정 정파가 조정을 주도했으므로 경상도 출신이 문과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과 급제자가 끊기면 집안도 기울기 마련이다. 벼슬길에 오를 사람이 사라지면 양반 행세도 어려워진다. 문과의 길이 막히자 이 집안은 다른 선택을 했다. 문과 대신 무과였다. 무예를 글보다 낮게 평가하던 사회에서 조심스럽게 택한 차선책이었다.
17세기 중반부터 이 집안에서 무과 급제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문을 처음 연 사람은 정영이었다. 그는 장원으로 무과에 급제했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위해 남한산성에 들어가 싸웠다. 그 공으로 「호종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후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 집안에서는 무과 급제자가 34명 나왔다. 경상도 선산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무과 합격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무과의 핵심은 활쏘기다. 목전, 철전, 편전, 유엽전 등 시험 과목의 절반 이상이었다. ‘기사’에서 ‘기추’로 이름이 바뀐 시험 과목 역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예였다. 또 활쏘기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기술이 아니었다. 충무공 이순신도 스물둘에 활을 잡아 10년 가까이 연마한 뒤에야 무과에 붙었다.
선산의 해주 정씨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전략을 세웠다. 집 근처에 활쏘기 연습장을 만들고, 실력 있는 사범을 외부에서 초빙해 자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오늘날로 말하면 특별 과외를 시킨 것이다. 과목이 수학이나 영어가 아니라 활쏘기였을 뿐이다.
집안의 실질적인 전략가는 정유관·정필수 형제의 아버지 정지신이었다. 스물한 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령을 여러 차례 지낸 그는 자신에서 그치지 않고 집안 전체를 설계했다. 두 아들을 무과로 보냈고, 아우도 함께 공부시켰으며, 김천까지 가서 활쏘기 교사를 데려왔다.
그의 집에는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활쏘기를 배우러 오는 이들, 시험 정보를 얻으러 오는 이들, 합격 비결을 물으러 오는 이들, 상경하다 궁금해서 들르는 이들. 훗날 무과에 급제해 삭주 부사를 지낸 노상추도 그곳에서 활쏘기를 익혔다. 활터는 그저 활 쏘는 연습장이 아니었다. 무과 급제를 꿈꾸던 이들의 아지트였다.
1784년의 과거는 정조가 문효세자의 책봉을 경축하면서 연 특별 시험이었다. 문과 급제자는 고작 18명이었으나 무과 급제자는 무려 2692명에 달했다. 넷이 한꺼번에 붙은 건 그 덕도 있었다. 그러나 이 집안 사람이 네 명이나 들어간 건 요행이 아니었다. 16년, 14년의 연습이 쌓인 결과였다.
“문과만 답인가?”
이 질문을 250년 전 어느 경상도 양반들이 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과에서 답을 찾았다. 그 답이 옳았는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다. 다만 분명한 건 그들이 집안의 사활을 건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성취하기 위해 전략을 세웠으며 한 세대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함께 실행했다는 점이다.
무과 합격자 넷 중 정유관은 남해 현령, 정유철은 영산 군수를 지냈다.
우리는 흔히 과거 급제를 개인의 재능과 노력의 결과로 기억한다. 선산의 해주 정씨 이야기는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다. 활 한 발은 혼자서 쏘는 것이지만 그 활을 당기기까지 집안이 함께 움직였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3)
정해은 순천향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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