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만 '한여름 밤의 꿈' 국내 초연
한 해 국내 무대에 오르는 공연은 2만∼3만여 건. 이 수많은 연극·뮤지컬·무용·콘서트 가운데 극소수만이 관객 기억에 ‘명작’으로 남는 영광을 누린다. 지난 주말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국내 초연된 알렉산더 에크만과 발레 도르트문트의 ‘한여름 밤의 꿈’도 그러하다. 천재 안무가의 비범한 상상력과 연출, 탁월한 무용수들의 헌신적인 춤이 축제와 꿈의 경계를 허무는 압도적 경험을 만들어냈다.
백야(白夜)의 나라 스웨덴 출신인 에크만이 북유럽 명절 하지(夏至) 축제를 소재로 만들어 2015년 로열 스웨덴 발레단이 초연한 작품이다. 기나긴 밤 내내 함께 마시고 춤추다 잠드는 공동체적 경험이 배경인데 에크만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춤판을 빚었다. 한 장면 안에서 여러 사건이 동시에 벌어지고, 빼곡한 디테일로 채워진 무대는 거대한 세트장 같다.
무대를 물성(物性)으로 압도하는 에크만의 연출은 여전하다. 하늘에서 초록색 볼풀 공 4만 개가 쏟아진 ‘플레이(PLAY)’, 무대에 물 5000ℓ를 채운 ‘백조의 호수’에 이어 이 작품에선 무대를 가득 채운 건초 더미와 수십 미터는 됨직한 길이의 대형 테이블, 사람보다 큰 청어 모형 등이 등장한다.
1막 무대는 여름 내음이 물씬 풍긴다. 무대를 뒤덮은 황금빛 건초 더미 위에서 무용수들은 몸을 던져 뒹굴며 춤을 추고 흥을 돋운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꽃과 건초로 장식한 기둥, 메이폴(Maypole)이 솟는다. ‘5월의 나무’라는 뜻을 지닌 하지 축제의 심장이다. 사람들은 그 둘레를 둥글게 돌며 춤추는데, 개구리를 흉내 낸 익살스러운 춤이 재밌다.
축제가 무르익으면 만찬이 시작된다. 거대한 식탁에 줄지어 앉은 남녀는 점잖게 식사를 시작하나 어느 순간 술의 신 바쿠스가 강림한 듯 흐트러진다. 잔이 거듭될수록 남녀는 본성을 드러낸다. 30여 명의 남녀가 싸우고, 쓰러지고, 토하고, 웃고, 노래하고, 사랑을 나눈다. 카메라를 든 남자는 난장 속을 헤집으며 사진을 찍는다. 어떻게 마무리될까 궁금할 무렵 파티는 돌연 멈춘다. 무용수들이 잔을 들고 무대 앞 열에 나란히 서서 객석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인사를 건넨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2막에서는 무대 위에 설치된 전자 달력·시계가 부각된다. 점멸하는 조명과 라디오·TV 채널 신호를 찾는 듯한 굉음 속에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만찬에서 먹고 마시다 잠든 남자는 다시 축젯날 아침처럼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건초를 끌어안고 춤추던 일상은 사라졌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테이블이 떠오르고 물고기가 허공을 헤엄치는 무대가 펼쳐진다. 머리 없는 양복남, 공중에 매달린 침대, 역시 허공으로 솟아오른 긴 테이블.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의 화폭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쏟아진다. 그리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청어 아래에서 무용수들은 굉음을 내며 마치 발작하듯 춤을 춘다. 문명과 규칙이 지배하던 낮의 질서가 무너지고, 현실을 교묘하게 뒤튼 아름다운 악몽이 펼쳐진다.
비슷한 춤을 떠올리기 힘든 수준인 광란의 춤판은 어느 순간 잦아들고, 무대는 다시 비워진다. 남녀는 사랑을 나누고, 두 여성 무용수가 양편에서 나와 천천히 무대를 가로지른다. 걷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춤이 된다. 그리고 에크만의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한여름 밤의 꿈’의 절정이 시작된다. 그토록 많은 소도구와 장식·이미지가 범람했던 무대는 사라지고 모든 무용수는 태초의 차림만으로 형언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지닌 군무를 춘다. 꾸밈없는 몸에서 나오는 춤은 보는 이에게 특별한 감정의 북받침을 안긴다.
‘한여름 밤의 꿈’의 또 다른 비범함은 작곡가 미카엘 칼손의 음악에서 나온다. 무대 위 일곱 명의 연주자가 현악사중주와 피아노, 타악기, 전자음을 엮어 독특한 질감을 만든다. 그 위로 고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여성 보컬이 마치 판소리 구음(口音) 같은 창법으로 노래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발레 도르트문트는 에크만의 천재성을 헌신적인 춤과 연기로 충실히 담아냈다. 12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발레단인데 현대적 무용 언어를 받아들이며 국제적 위상을 쌓고 있다. 클래식 발레의 엄격한 신체 통제력을 뼈대로, 복잡하게 얽힌 장면들을 일사불란하게 풀어낸다. 마치 ‘컷’없이 영화 촬영을 완성해내듯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춤과 연기를 펼쳐낸다.
현실과 초현실이 뒤섞인 이 작품을 두고 에크만은 누구나 자유롭고 생생한 꿈을 꾸며, 그 꿈속에서는 어떤 일이든 가능하고 우리의 꿈은 끝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잠에서 깬 ‘꿈꾸는 남자’는 다시 커튼 뒤로 빨려 들어가 한여름 밤의 단꿈과 악몽을 반복하는 ‘루프’속에 갇힌듯하다. 매일 밤 막이 내리고 이튿날 새 막이 오르는 공연장의 순환과도 닮았다. 그는 ‘극장의 마법’을 현존(presence)이라 부른다. 객석의 모두가 그 순간에 온전히 함께 존재하며 저마다의 삶과 고민을 잊는 것, 그것이 마법이다.
LG아트센터는 명작 많은 극장으로 손꼽힌다. 2000년 개관작 피나 바우슈의 ‘카네이션’을 시작으로 탈리아 극장의 ‘단테의 신곡 3부작’, 이보 반 호프의 ‘로마 비극’, 로베르 르파주의 ‘887’, 양정웅의 ‘코리올라누스’, 이자람의 ‘억척가’등. 오랫동안 두고두고 이야기되는 작품을 여럿 무대에 올렸다. ‘한여름 밤의 꿈’이 그 계보에 새로 기록될 듯해 보인다. 서울 무대는 전석 매진으로 끝났고 19∼20일 화성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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