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서 나고 자란 김문호 관장
작품 수집하면서부터 꿈꿔온
‘왕릉 옆 미술관’ 끝내 이뤄내
‘일상의 배경’·‘고대의 오브제’
‘경주만의 도시적 맥락’ 완성
관람객 움직임 따라 변화 재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 도시 경주(慶州)에서 가장 경주다운 풍경은 무엇일까?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와 같은 기념비적인 신라의 유산들이 보여주는 경관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나는 도심 한복판에 봉긋하게 솟은 고분군(古墳群)을 꼽는다. 물론 공주시, 부여군, 김해시에도 비슷한 형태의 고분군이 존재하지만, 현재의 생활 터전 한가운데에 1500여년 전에 죽은 자들의 영토가 공존하는 풍경은 경주가 유일하다.
경주에 있는 고분군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원도심과 가까운 곳은 대릉원이다. 그래서 1971년 발표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고분군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왕릉 바로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 시절 경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이들은 고분을 놀이터 삼아 친구들과 오르내리며 뛰어놀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중에는 1999년 일본에서 포스팅(Posting) 전문 기업 ‘K&파트너스’를 설립한 뒤 업계 2등으로 사업을 키운 김문호 관장도 있다. 1962년 경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그는 미술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언젠가 왕릉이 보이는 자리에 미술관을 짓겠다는 마음을 품어왔다. 그러던 중 대릉원 바로 옆에 있는 숙박 시설이 매물로 나오자 주저 없이 이를 매입했다. 그래서 ‘고분이 보이는 자리’는 ‘오아르(OAR)미술관’의 시작이자 토대다.
김 관장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가 혁신적인 개념으로 미술관을 설계해 주기 바랐다. 아마도 자신의 소장품이 다른 미술관의 소장품에 비해 지명도가 낮다는 약점을 건축의 힘으로 보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선임된 건축가 유현준도 처음에는 화려하고 눈에 띄는 외관으로 미술관을 설계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장을 방문한 뒤 고분이 미술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했다.
사물을 관찰하는 광학 도구의 이름 뒤에는 대개 영어 접미사 ‘~scope’가 붙는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경(鏡)’이다. 고분이 보이는 자리에 들어선 오아르미술관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시설인 동시에, 건축물 자체가 왕릉을 바라보는 커다란 ‘스코프(Scope)’다. 그리고 이 ‘스코프’는 단순히 왕릉을 바라보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관람객의 발길이 닿는 공간에 반응하며 세 가지 버전으로 변주한다.
첫 번째 버전은 표준 규격보다 가로의 비율이 높은 와이드 스크린(Wide screen) 방식의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다. 오아르미술관 1층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을 채운 널찍한 커피 바(Coffee bar)와, 그 반대편에서 왕릉의 풍경을 막힘 없이 담아내는 가로형 통창이 마주 보고 있다. 그사이에 놓인 탁자와 의자, 그리고 그곳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 뒤로 미술관 옆 좁은 길(태종로727번길)을 지나는 이들의 움직임이 포개진다.
여기에 더해 건축가 유현준은 고분군의 풍경이 반사될 수 있도록 커피 바 뒤쪽 벽면을 거울처럼 매끄러운 스테인리스 스틸 플레이트(Mirror stainless steel plate)로 마감했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왕릉의 실상(實像)이 커피 바 뒷벽에 반사상(反射像)과 함께 카페 이용자들을 둘러싸며 입체감을 더한다. 미술관 1층의 ‘시네마스코프’를 통해 바라본 고분은 폭 30m가 넘는 와이드 스크린에 상영되는 삶이라는 영화의 ‘배경’이다.
두 번째 버전은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 일명 ‘만화경(萬華鏡)’이다. 색유리 조각이 거울에 비쳐 기하학적인 대칭 무늬를 만드는 만화경의 매력은, 기구를 돌릴 때마다 그 무늬가 계속 바뀐다는 데 있다. 오아르미술관 2층에도 1층과 마찬가지로 고분을 향해 탁 트인 통창이 있다. 그런데 2층 천장은 평평한 1층과 달리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사선의 천장과 볼록한 왕릉의 실루엣 사이에 담기는 하늘의 면적은 관람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끊임없이 모양을 바꾼다. 동시에 전시실 한가운데 놓인 계단의 사선도 천장의 사선과 함께 하늘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왕릉의 능선에 입체적인 간섭을 일으킨다.
2층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고분은 예술작품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을 때 마주하는 풍경이자, 함께 감상하는 또 하나의 예술품이 된다. 그래서 전시 기획이 바뀔 때마다 창밖 고분의 느낌도 매번 달라진다. 미술관 2층의 ‘칼레이도스코프’를 통해 바라본 고분은 1500년간 변하지 않은 언덕이 아니라 관람객의 위치, 함께 바라보는 예술작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고대의 오브제(Objet)’다.
마지막 버전은 ‘망원경’을 의미하는 ‘텔레스코프(Telescope)’다. 2층 전시실 한가운데 놓인 계단을 오르면, 대릉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옥상에 닿는다. 더 이상 고분 위로 올라갈 수 없기에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왕릉의 모습은 과거 놀이터 삼아 오르내렸던 이들의 시선을 상상하게 한다.
옥상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포석로(일명 ‘황리단길’) 양쪽에 밀집된 한옥 지붕들이 보인다. 그다음 반대편으로 시선을 바꾸면 근현대에 지어진 상자형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동네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 지점에서 오아르미술관의 옥상은 고대로부터 뻗어 나온 시간의 선이 끊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가장 경주스러운 풍경의 전망대다. 그리고 ‘텔레스코프’를 통해 바라본 고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전통과 현재를 매개하는 경주만의 독특한 ‘도시적 맥락’으로 완성된다.
경주에서 고분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변화해 왔다. 누군가에게는 유년의 놀이터였고, 누군가에게는 천년 고도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적이며, 누군가에게는 산책로 옆의 언덕이었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존 버거(John Berger)는 그의 책 ‘Ways of Seeing(보는 방법)’에서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무엇을 아느냐, 혹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정의했다. 이를 경주에 적용해보면, 우리가 경주의 역사와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축적해 왔느냐에 따라 눈앞의 왕릉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미술관의 명칭인 ‘오아르’는 “오늘 만나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선상에서 ‘오늘’이란 지금 흘러가고 있는 시간이며, 이를 더 잘게 나누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사물과 이를 바라보는 주체는 역동적인 관계를 이룬다. 결국 ‘오늘 만나는 아름다움’이란, 이미 존재하는 대상에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그 순간의 맥락을 부여함으로써 탄생하는 ‘새로움’에 가깝다.
신라의 고분은 오아르미술관이 제공하는 세 가지 스코프를 통해 ‘일상의 배경’, ‘고대의 오브제’, ‘경주만의 도시적 맥락’이라는 오늘의 새로움으로 치환된다. 오아르미술관은 고분의 풍경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단순한 전시시설이 아니다. 오랜 시간 멈춰 있던 경주의 풍경을 오늘 우리의 일상 속으로 다채롭게 밀착시키는, 가장 현대적이고 주체적인 ‘보는 방법’의 제안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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