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전통시장인 메르카도(Mercado)를 찾는다. 시장에는 늘 사람들의 목소리와 활기가 넘친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을 이야기할 때 시장만큼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있다. 바로 백화점이다.
한국에서 백화점이 특별한 날 방문하는 장소라면, 스페인에서는 훨씬 일상적인 의미를 지닌다. 퇴근길에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 식사를 하고, 가족과 주말을 보내는 공간이다. 특히 연말이 되면 크리스마스와 1월 6일 동방박사의 날(Reyes Magos)을 앞두고 선물과 명절 음식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더욱 붐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러한 풍경 속에서 백화점은 단순한 소비의 공간을 넘어 가족의 기억과 계절의 추억이 쌓이는 장소가 된다.
그 중심에는 스페인 유일의 백화점 체인인 엘 코르테 잉글레스가 있다.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스페인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 온 이곳은 부모의 손을 잡고 처음 방문했던 아이가 훗날 자신의 자녀의 손을 잡고 다시 찾는 공간이다. 전국 주요 도시에 자리한 엘 코르테 잉글레스는 단순한 백화점을 넘어 세대를 잇는 기억의 공간이자, 스페인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담아내는 하나의 사회적 풍경으로 자리해 왔다.
이번 마드리드 출장 중 오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를 엘 코르테 잉글레스 카스테야나로 정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매장을 둘러보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백화점은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잠시 고객 라운지에 들러 쉬었다. 라운지에는 현지인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도 눈에 띄었다. 일부는 쇼핑 후 텍스 리펀드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EU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텍스 리펀드 비율인 약 16%를 돌려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공간이 인상적인 이유는 쇼핑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곳이 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층까지, 학생과 직장인, 관광객과 지역 주민은 물론 때로는 왕실 인사들까지 같은 공간을 이용한다. 특정 계층만의 장소가 아니라 스페인 사회 전체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일종의 ‘생활문화 플랫폼’인 셈이다.
어느덧 친구와의 약속 시간이 되어 스페인 미식 문화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라 바라 델 구르메로 향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보통 밤 9시 이후에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곳에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친구와 함께 칼라마리, 하몬,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마드리드식 스테이크를 맛보았다. 갓 튀겨낸 칼라마리는 바삭했고, 하몬은 깊은 풍미와 감칠맛을 품고 있었다. 라 바라 데 구르메는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다. 최고급 하몬과 치즈, 올리브오일, 와인에 둘러싸여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미식 공간이다. 전통적인 타파스 문화와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인 라비오XO(RavioXO)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타파스부터 세계적 수준의 파인 다이닝까지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 10시가 가까워졌다. 백화점을 나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단순히 상품이 오가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간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것. 누군가는 하루를 정리하고, 누군가는 가족의 기념일을 준비하며, 또 누군가는 오래된 우정을 이어간다.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이며 한 도시의 기억이 만들어진다.
관광안내서에는 잘 소개되지 않지만, 바로 그곳에 스페인의 가치관과 문화,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풍경이 살아 있다. 어쩌면 스페인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느 저녁 엘 코르테 잉글레스의 구르메 공간이나 바 한편에 앉아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뉘엿뉘엿 저무는 석양 아래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그 모습 속에는 화려한 관광명소에서는 만날 수 없는 스페인의 진짜 얼굴이 담겨 있다. 여유를 즐길 줄 알고, 사람과의 관계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 그것이 내가 30년 가까이 스페인을 오가며 발견한 가장 따뜻하고도 가장 스페인다운 풍경이다.
이은진 스페인전문가·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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