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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LG 떠난 후 반전, 허성태·진기주·정형돈의 ‘드라마틱’ 인생 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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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기자 sj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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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인 궤도를 버리고 택한 맨땅, 그곳에서 실력으로 입증한 성실함의 가치

매달 정해진 날짜에 통장에 찍히던 안정적인 숫자를 스스로 지워버린 이들이 있다. 대한민국 취업준비생들의 최종 목적지이자 직장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삼성과 LG의 울타리를 제 발로 걸어 나온 사람들이다. 카메라 불빛이 켜지는 대중문화계 이면에는 안정이 주는 관성을 거부하고 맨땅에서 다시 시작한 기록이 존재한다. 배우 허성태와 진기주, 방송인 정형돈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이 포기한 직급과 연봉, 퇴사 후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오늘날 매일 아침 사표를 고민하는 직장인들에게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대기업의 안정을 버리고 스스로의 이름으로 무대에 선 허성태, 진기주, 정형돈. 빌리언스, 에프엘이엔티, 뉴시스 제공
대기업의 안정을 버리고 스스로의 이름으로 무대에 선 허성태, 진기주, 정형돈. 빌리언스, 에프엘이엔티, 뉴시스 제공

가장 이직하기 힘든 나이에 항로를 바꾼 이는 배우 허성태다. 부산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LG전자 해외영업부에 입사해 러시아 시장에서 TV 판매왕을 달성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대우조선해양 기획조정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2011년 기준 대리 말년차로 연봉 7000만원 이상을 받으며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안정적인 직장인의 삶이 보장된 시점이었으나 그는 미련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SBS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인 ‘기적의 오디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프로그램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데뷔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대기업 시절 받던 급여는 사라지고 매달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무수입 상태가 이어졌다. 단역을 전전하며 거주하던 아파트가 경매 위기에 처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감정적인 동요 대신 직장인 시절 몸에 익힌 성실함으로 버텼다. 단 한 줄의 대사가 주어지는 단역조차 러시아 영업 시절의 분석력을 발휘해 캐릭터를 연구했고, 수백 번의 오디션 낙방 끝에 2016년 영화 ‘밀정’에서 송강호에게 뺨을 맞는 신스틸러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산성’, ‘범죄도시’, ‘꾼’ 등의 작품을 통해 존재를 각인시킨 그는 2021년 글로벌 흥행작 ‘오징어 게임’으로 전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개성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LG전자와 대우조선해양에서 다져진 분석력을 무기로 단역을 거쳐 글로벌 흥행작의 주역이 된 배우 허성태. 빌리언스 제공
LG전자와 대우조선해양에서 다져진 분석력을 무기로 단역을 거쳐 글로벌 흥행작의 주역이 된 배우 허성태. 빌리언스 제공

허성태와 같은 길을 걸었던 진기주의 선택은 조금 더 빨랐다. 진기주의 궤도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공채의 문을 일찌감치 열었지만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중앙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23세에 삼성SDS IT 컨설턴트로 공채 입사했다. 누가 봐도 탄탄한 경력이 담보된 자리였다. 하지만 매일 모니터 앞에서 반복되는 업무는 그녀가 꿈꾸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출퇴근길마다 점차 어두워지는 자신의 모습에서 한계를 느낀 그녀는 입사 3년 차에 사직의 길을 택했다. 그녀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방송 기자의 꿈을 안고 G1방송(구 강원민방)에 입사해 수습 기자로서 현장을 누볐으나, 카메라 뒤가 아닌 앞에서의 열망을 확인하며 또 한 번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대기업 직원과 언론인이라는 이력을 모두 내려놓고 연기라는 본업으로 뛰어든 당시 나이는 26세였다.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출전해 입상하며 연예계에 발을 들였지만 늦깎이 신인 배우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수한 오디션 탈락이었다. 그녀는 기약 없는 고배의 연속에도 계속해서 오디션에 응시했고, 그 결과 2015년 tvN 드라마 ‘두번째 스무살’을 통해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다양한 조연을 거치며 내공을 쌓은 끝에 2018년 드라마 ‘미스티’와 ‘이리와 안아줘’를 통해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드라마 ‘오! 삼광빌라!’,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증명해 낸 그녀는 사회가 정한 엘리트 코스를 이탈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낸 주체적인 삶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삼성SDS IT 컨설턴트와 기자를 거쳐 연기라는 본업에 정착,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낸 배우 진기주.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삼성SDS IT 컨설턴트와 기자를 거쳐 연기라는 본업에 정착,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낸 배우 진기주.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앞선 두 사람이 선택한 삶의 방향은 방송인 정형돈의 행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95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에 고졸 공채 사원으로 입사했다. 6년간 근무하며 사내 가요제 대상을 차지하는 등 조직 생활에 적응한 모습을 보였다. 안정적인 연봉과 미래가 약속되어 있었지만, 그는 개그맨이 되겠다는 꿈 하나로 2002년 조직의 울타리를 넘어섰다. 퇴사 후 대학로 무명 시절의 생활은 월세를 내지 못해 동료들의 집을 전전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2002년 KBS 17기 공채 개그맨에 합격하며 지상파에 입성한 뒤 ‘개그콘서트’의 주요 코너를 흥행시키며 공개 코미디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새로운 판으로 영역을 확장해 ‘무한도전’의 초창기 멤버로 합류했다.

 

정형돈이 예능의 세계에서 ‘무한도전’을 비롯한 대형 프로그램의 메인 MC로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삼성전자 시절 몸에 익힌 업무 습관이 있었다. 정형돈은 실제 방송에서 삼성 시절 귀가 닳도록 들었던 ‘프로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결과로 말한다’는 조직 문화와 기획서 작성 버릇이 예능 아이디어 회의와 캐릭터 구축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6년 넘게 대기업 조직원으로 살아오며 체득한 기획력과 성실함은 정글 같은 대중문화계에서 그를 지탱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 그는 동료들과 함께 콘텐츠 기획사 뭉친프로젝트를 공동 창립해 대기업 시절 다진 기획 역량을 제작 영역으로 확장하는 한편, 채널A의 장수 프로그램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의 진행자이자 유튜브 크리에이터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삼성전자 시절 체득한 ‘결과로 말하는’ 기획 역량을 바탕으로 예능을 넘어 콘텐츠 제작자로 영역을 넓힌 방송인 정형돈. 채널A 화면 캡처
삼성전자 시절 체득한 ‘결과로 말하는’ 기획 역량을 바탕으로 예능을 넘어 콘텐츠 제작자로 영역을 넓힌 방송인 정형돈. 채널A 화면 캡처

이들이 대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일시적인 충동이나 타고난 재능 덕분이 아니다. 오히려 자리를 박차고 나온 그 안정적인 직장에서 수년간 체득한 업무 루틴과 자기 통제 능력은 그들의 성공에 있어 자양분이 되었다. 대기업이라는 안전장치를 떼어내고 온전히 자신의 이름 석 자로 실력을 입증해 낸 세 사람. 결국 이들이 증명한 성적표는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직장인 시절의 성실함이 다른 영역에서도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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