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수용·신뢰 구축엔 한계
몸짓·즉흥적 판단, 인간 능력
저자 ‘장인의 기술’로 칭하기도
양극화 속 관계 맺기 상품화 우려
부자들이 인간서비스 이용 가능성
“효율성보다 소통, 속도보다 연결
작은 실천이 인간다움 지킬 수 있어”
사람의 마지막 직업/엘리슨 J. 퓨/김재경 옮김/2만8000원
현대인에게 셀프계산대와 키오스크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마트에서는 직원 대신 기계와 마주하고, 음식점에서는 종업원을 부르기보다 화면을 터치해 주문한다. 은행 업무는 모바일 앱으로 처리하고, 학교에서는 교사의 설명보다 온라인 콘텐츠가 학습을 대신한다. 병원에서는 의사가 환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보다 데이터에 기반한 진료를 내리고, 상담 현장에서도 매뉴얼에 따른 자동화된 응답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사회학과 교수인 엘리슨 J. 퓨는 ‘사람의 마지막 직업’에서 이러한 변화로 현대인은 단순히 특정 직업을 잃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고유한 ‘일하는 방식’을 잃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상호 소통과 공감,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연결노동(connective labor)’인데, 인간다움의 증거인 이 연결노동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단절된 사람 관계를 이어주는 연결노동이야말로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직업’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상담사, 교사, 의사, 사회복지사, 관리자 등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 1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바탕으로 기술 발전이 노동 현장에 가져온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AI는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데 탁월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읽고 이해하며 신뢰를 구축하는 영역에서는 여전히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저자가 말하는 연결노동은 단순한 서비스 노동이 아니다. 상대의 감정을 읽고 갈등을 조정하며 위로와 공감을 제공하는 관계 중심의 노동이다. 몸짓과 표정, 즉흥적인 판단, 실수의 수정, 신뢰 형성 등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바탕이 된다. 저자는 이를 ‘장인의 기술’이라고 부른다.
AI 시스템 도입이 확산되면서 연결노동은 점차 분리되고 해체된다. 예를 들어 앱 중심 교육을 운영하는 실리콘밸리의 한 실험학교에서는 교사의 역할이 ‘콘텐츠 전문가’와 ‘조언자’로 나뉘어 운영된다.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적 관계 형성의 기능이 분리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며 연결노동의 자동화를 정당화하는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인간보다 낫다’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기술 발전이 가져온 역설이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빠르게 연결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더 깊은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과 알고리즘은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인간을 데이터의 집합체로 환원하면서 개별성과 관계성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탈개인화(depersonalization)’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재개인화(re-personalization)’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고 소통하는 연결노동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환자를 데이터가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의사, 학생을 성적이 아닌 존재 자체로 존중하는 교사, 고객을 단순한 거래 대상이 아닌 이웃으로 대하는 직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소개된다. 저자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변화와 치유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갈등과 오해조차 인간다운 성장 과정의 일부라는 시선도 인상적이다.
책 후반부에서는 연결노동의 문제를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구조의 문제로 확장한다. 플랫폼 경제와 사회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인간적 돌봄과 관계 맺기마저 상품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AI가 제공하는 대체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는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는 전망은 섬뜩할 만큼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로 네덜란드의 ‘대화형 계산대(kletskassa)’를 소개한다. 네덜란드 일부 슈퍼마켓에서는 계산 속도를 높이는 셀프계산대 대신 계산원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산대를 운영한다. 특히 노인이나 1인 가구가 짧은 대화를 통해 사회적 연결감을 느낄 수 있게 한 제도다. 효율성은 다소 떨어질 수 있지만 인간적 관계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재개인화의 상징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결국 사람들은 여전히 관계를 원한다. 효율성보다 소통을, 속도보다 연결을 선택하려는 작은 실천들이 인간다움을 지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연결노동을 존중하는 조직문화와 사회적 투자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공감과 돌봄, 신뢰와 위로의 가치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은 수많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통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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