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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시대에도 山寺는 지식인들의 배움터였다 [조선생활실록(實LOG)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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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깊은 산속의 사찰에 오면 아직도 불교의 정신을 잇고 있고, 세속을 떠난 탈속적 분위기가 충만하다.” (다카하시 도루, 『이조불교』)

 

산속 사찰인 산사는 조선 불교 신앙과 의례의 중심이자 승려들의 수행 공간이었다. 그 숫자가 1500개 이상에 달했다. 조선 불교계는 선과 교학 전통을 함께 이어가야 했는데, 17세기에 체계를 갖춘 승려 교육과정은 10년 정도 선과 교를 배우고 화두를 들고서 의심을 깨치는 간화선과 화엄학이 핵심이었다. 금산사,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등에서 열린 화엄대회에는 1,000명이 넘는 대중이 모여 성황을 이루며 산사가 지식 공유의 거점임을 증명했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에서 절 마당의 관등을 찍은 흑백사진으로, 사진 뒷면에 ‘安城 사월초파일놀이’라고 쓰여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에서 절 마당의 관등을 찍은 흑백사진으로, 사진 뒷면에 ‘安城 사월초파일놀이’라고 쓰여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7세기에는 선과 교에 염불을 더한 3문 수행 체계도 정착되었다. 마음이 정토임을 깨닫는 염불선 수행, 서방 극락정토로의 왕생을 꿈꾸는 염불신앙이 확산되면서 염불은 화엄, 간화선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승려들은 선과 교를 닦은 후 염불문에 전념했고 승속이 함께 하는 염불회, 염불결사가 조직되었다. 쾌선(快善) 대사는 염불을 우위에 두고 선과 교를 포섭했는데, 아미타불을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내용의 『염불환향곡』을 지어 수행의 논리적 귀결점을 제시했다.

 

유일(有一) 선사는 유교 사회에 부합하는 왕생 기준을 제시해 종교 간 윤리적 접점을 모색했다. 『염불보권문』에는 극락왕생 이야기가 실렸고, 『예념왕생문』 등 의식집은 1,000부씩 찍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신앙에 대한 높은 사회적 수요를 방증한다.

 

왕랑반혼전은 조선시대 불교 소설로, 불교를 비방하던 사람이 지옥에 떨어졌으나 염불을 정성껏 함으로써 오히려 환생하여 극락왕생한다는 내용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왕랑반혼전은 조선시대 불교 소설로, 불교를 비방하던 사람이 지옥에 떨어졌으나 염불을 정성껏 함으로써 오히려 환생하여 극락왕생한다는 내용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정토를 주제로 한 소설도 유행했는데 연기적 인과에 따른 환생과 극락왕생을 다룬 「왕랑반혼전」이 많이 읽혔다. 19세기에는 건봉사, 미황사, 범어사 등에서 만일염불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27년 이상 매일 염불을 실천하는 모임이었다.

 

김만중이 쓴 구운몽의 19세기 필사본으로, 성진의 불교적 삶과 양소유의 유가적 삶을 모두 긍정하는 내용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김만중이 쓴 구운몽의 19세기 필사본으로, 성진의 불교적 삶과 양소유의 유가적 삶을 모두 긍정하는 내용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불교는 업과 윤회를 매개로 내세의 길을 안내했다. 사후 명부에서 현생의 죄업을 심판받았기에 지장보살과 시왕에게 선처를 호소해야 했고, 부모의 명복을 비는 사십구재가 널리 행해졌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유교와 불교의 역할을 구분하면서도, 두 가르침을 인간의 삶과 죽음을 지탱하는 상호 보완적 체계로 긍정했다. 그는 유교가 현실의 생활, 불교가 현실을 초월한 지점에서 가르침을 준다며 유불의 효용을 살폈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에서 관등 행사를 찍은 흑백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에서 관등 행사를 찍은 흑백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산사에서는 연등회와 우란분재가 연례행사로 열렸다. 우란분재는 부모와 조상의 영혼을 천도하고 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17세기에 이식은 일본인에게 조선의 풍속을 설명하면서 “4월 8일은 부처가 탄생한 날이라 불가에서 연등을 하며, 관등 놀이가 세시풍속으로 이어져 왔다. 7월 15일 백중 때의 우란분재는 조상의 혼백을 위로하는 것으로 백성들이 많이 따른다”라고 말했다. 한편 칠성각과 산신각이 사찰 경내에 세워진 것은 불교가 민간 신앙을 포섭하며 토착화된 결과였다.

 

산사는 유학자들의 배움의 터전이기도 했다. 세종 때 신숙주, 성삼문 등이 행한 사가독서는 산사가 국가적 인재 양성을 지원하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편찬에 참여한 서거정도 “여러 산사에서 글을 읽었는데 다닌 곳마다 자연이 뛰어나 시를 짓고 기록을 남겼다”라고 회고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온 강항은 불갑사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지역 지식 교류의 거점이었다고 평하였다.

 

사대부나 유생이 명산을 답사하고 산사에서 승려와 교류하는 일은 흔한 광경이었다.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은 1688년 팔공산 은해사를 거쳐 운부사에 가서 꿀물과 곶감을 대접받고 학도 100여 명이 학승에게 『화엄경』을 배우는 장면을 직접 보기도 했다. 홍만종도 속리사 승려들의 모습에서 삼대의 위의를 떠올리며 불교 의례의 엄숙함을 기록했다.

 

19세기 조선의 화가 기산 김준근이 그린 예불 장면. 그림 상단에 ‘중이 부처께 예불하는 모양’이라고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세기 조선의 화가 기산 김준근이 그린 예불 장면. 그림 상단에 ‘중이 부처께 예불하는 모양’이라고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승가일용식시묵언작법』에는 식사와 예불 등 사찰의 생활과 행사 절차, 의식 및 문화의 구체적 모습이 실렸고, 불교 상례집 『석문상의초』에는 장례와 제사 등의 절차가 담겨 있다. 다가오는 부처님오신날의 연등 공양과 관등 놀이는 종교 의식과 세속 축제가 융합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지금도 지속되는 이 전통은 산사가 지닌 문화적 생명력을 미래로 잇는 가교가 된다. 이처럼 승려의 수도처였던 산사는 유불 사상이 상호 교감하는 공간인 동시에 종교·민속의 실천적 결합이 일어나는 복합 문화 거점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37)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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