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란과 모두 관계…“독보적 위치” 평가
전쟁 장기화 경제·안보 부담…중재 적극적
트럼프家 기업과 암호화폐 계약…노벨상 추천도
개인 인맥·소통 중시하는 트럼프에 ‘환심’
“파키스탄 총리 셰흐바즈 샤리프와 파키스탄군 총사령관 아심 무니르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이란에 대한 폭격과 공격을 2주간 유예하는 데 동의한다.”
4월 8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이란과의 휴전 유예 소식을 알렸다. 이날 아침까지 “문명 하나가 오늘 밤 사라질 수 있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던 트럼프가 파키스탄의 중재를 수용한 것이다. 이란 외무장관 아바스 아라그치도 “친애하는 형제들, 샤리프 총리와 무니르 총장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국제사회도 이를 일제히 환영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질문이 뒤따랐다.
왜 파키스탄이었나.
◆파키스탄밖에 없었다
이란과 미국을 중재할 수 있는 국가는 애초에 많지 않았다. 그간 미·이란 핵협상의 주선국 역할을 해온 카타르·오만 등 중동 국가들은 이번 전쟁에서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직접 받은 당사국이다.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자국 내 미군 기지를 둔 나라들은 이란의 연쇄 타격 대상이 됐다.
반면 파키스탄은 미국의 ‘주요 비(非)나토 동맹국’이면서도 자국 내 미군 기지를 두지 않은 나라다. 지난해 6월 미국이 이란 핵시설을 폭격했을 때 파키스탄은 공식적으로는 이를 규탄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과는 관계를 강화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란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이란은 1947년 파키스탄 독립을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다. 두 나라는 약 900㎞의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파키스탄 전체 인구의 최대 20%인 약 2500만명이 시아파 무슬림이다. 수니파가 다수인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비교할 때 이란 내 강경파를 설득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미국은 파키스탄을 이란의 ‘보호 강국’으로 지정했다. 워싱턴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에는 지금도 이란 이익대표부가 운영되고 있다. 공식 채널이 끊긴 상황에서 사실상 제도화된 미·이란 연결선으로 기능해온 것이다.
애덤 와인스타인 퀸시연구소 중동 프로그램 부소장은 로이터에 “파키스탄은 미국·이란 양국 모두와 실질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긴장 관계를 관리해 온 역사가 있다”며 “신뢰 가능한 중재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걸프 국가들에게 없는 독보적 위치”라고 평가했다.
파키스탄이 중재에 적극 나선 배경에는 전쟁 장기화가 자국 경제와 안보에 미칠 부담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동 전쟁이 길어질 경우 파키스탄까지 불안정성이 번져 국경 안보가 흔들릴 수 있고, 연료 공급 차질에 따른 경제적 부담도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석유와 가스 대부분을 중동 국가들에 의존하고 있다. 또 중동에서 일하는 파키스탄인 500만명이 본국으로 보내는 송금액은 파키스탄 전체 수출 수익에 맞먹는 규모다. 이번 중재를 오로지 평화 중재자로서의 외교적 역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번 중재를 계기로 파키스탄의 외교적 위상과 역량은 주목을 받게 됐다. 애틀랜틱 카운슬의 남아시아 전문가 마이클 쿠겔만은 이번 중재를 두고 가디언에 “파키스탄이 수년 만에 거둔 가장 큰 외교적 성과”라고 말했다. 미국 중동정책위원회의 선임연구원 카므란 보카리도 로이터에 “파키스탄의 전략적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고 평가했다.
◆트럼프에 밀착…호감 산 파키스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달 보도한 ‘파키스탄이 트럼프를 끌어들이고 스스로를 평화 중재자로 포장한 방법’ 제하의 기사는 트럼프가 왜 파키스탄 군 당국을 신뢰하게 됐는지를 다른 측면에서 보여준다.
WSJ는 첫 집권 당시 파키스탄을 “거짓과 기만만 일삼는 악의적 행위자”라고 비판했던 트럼프가 어떻게 다시 파키스탄에 신뢰를 보내게 됐는지 추적했다. 그 배경으로 트럼프 측근, 암호화폐, 핵심 광물 등을 포함한 일련의 거래를 통해 파키스탄이 미국의 호감을 회복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핵심은 무니르 총장과 윗코프 가문의 관계다. WSJ에 따르면 무니르 총장은 올해 1월 이슬라마바드에서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 최고경영자(CEO)인 재커리 윗코프와의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WLF는 트럼프 일가의 암호화폐 기업이며, 재커리는 트럼프의 측근이자 중동 특사인 스티브 윗코프의 아들이다. 이 회의에서 파키스탄 재무부는 WLF의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USD1’을 국가 결제 시스템에 도입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외국 정부가 WLF와 맺은 첫 번째 스테이블코인 계약이었다. 미국 대통령 및 중동 특사 가족과 파키스탄의 이해관계가 경제적으로 맞물린 셈이다.
윗코프 특사는 2월 19일 워싱턴에서 열린 트럼프의 ‘국제평화위원회’ 창립 회의에서 뉴욕 루스벨트 호텔을 파키스탄항공(PIA)과 미국이 공동 재개발하는 협약을 발표했다. 파키스탄은 이 회의에 가장 먼저 가입한 국가 중 하나였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무니르를 “강인한 사나이, 훌륭한 전사”라고 추켜세웠다.
파키스탄은 지난해 인도·파키스탄 무력충돌 이후 미국이 중재에 나선 데 대해 감사를 표하며 트럼프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이 대미 관계 복원 과정에서 트럼프 개인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상징자본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접근해 왔다는 해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 뉴욕포스트 인터뷰에서 무니르를 “환상적(fantastic)이고, 이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라며 “이란 협상에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AFP통신은 이를 두고 “단순한 외교적 수사 이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평가했다.
파키스탄은 이번 위기에서 분명한 역할을 했고, 미국과 이란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중재자로 나설 지정학적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무니르 총장을 중심으로 한 최근의 대미 접근 과정을 고려하면, 이번 중재를 순수한 평화외교의 성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테이블코인 계약, 루스벨트 호텔 재개발 협약, 트럼프 노벨평화상 추천은 파키스탄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방식으로 워싱턴, 특히 트럼프 개인과의 관계를 다져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된다. 제도적 채널보다 개인적 인맥과 직접 소통을 중시하고, 공개적 찬사와 호의적 제스처에 우호적으로 반응하는 트럼프식 외교가 이번 협상에도 짙게 반영됐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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